고등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이제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니 거기까지 키워준다. 고등학교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치는 전인교육(全人敎育)을 목표로 한다. 그다음부터는 네 힘으로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아라.” ‘공부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만 가볍게 해석했던 저 말을 아버지는 지켰다. 나는 졸업하고 나서야 깨닫고 따랐다. 아버지는 한 푼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내가 한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드시 지적했다. 한참 자란 뒤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서울로 올라오던 때 아버지가 처음으로 당신의 아버지를 회고했다. “네 할아버지가 내게 준 유일한 가르침이다”라면서 종오소호(從吾所好)란 고사성어를 가르쳐줬다. 종오소호는 공자가 한 말이다. 논어(論語) 술이(述而)편에 나온다. 원문은 “부유해지려 해서 부유해질 수 있다면, 비록 채찍 잡는 일일지라도 내 기꺼이 하겠다. 그러나 부유해질 수 없다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채찍 잡는 일은 천한 직업인 마부를 말한다. 아버지는 “사람은 모두 부유하길 바란다. 공자 또한 그랬다. 부유해지는 일이 어디 마음대로 되느냐? 더욱이 떳떳하게 부유해지는 일이란 어렵다. 공자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를 ‘간서치(看書癡)’로 평가했다. 낯선 단어였다. 뒤에 찾아보니 간서치는 책만 읽어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마흔둘에 자식을 얻은 내 증조부를 제치고 82세에 손자를 본 고조부가
휴일 새벽 전화벨이 모두를 깨웠다. 은행 다닐 때다. 다급한 전화 목소리는 다짜고짜 부장이 찾는다며 바로 출근하라며 대답을 듣지도 않고 끊어졌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옷을 챙겨입고 나설 때 이미 거실에 나와 앉은 아버지가 “뭔 일이냐?”며 물었다. “짚이는 일이 있을 거 아니냐?”며 말문을 연 아버지의 질문은 집요해 나가려던 나를 눌러 앉혔다. 네 가지 업무 때문인 거 같다고 하자 이내 단답식으로 캐물었다. “상대편이 그렇게 주장하는 진의는 뭐냐? 이편의 입장은 최종 결정인 거냐?”로 시작한 질문은 이제껏 내가 검토했던 대안 이상이었다. 한 시간은 훨씬 지나서야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새벽 시간인데도 상사 세 분은 내가 올린 보고서를 놓고 늦게 온 나를 세워둔 채 물었다. 바로 좀 전 아버지가 캐물었던 질문 그대로였다. 서슴지 않고 모두 답하고 의견을 제시했다. 부장은 바로 결론 내고 무겁던 긴급회의는 싱겁게 끝났다. 부장이 내 어깨를 두들기고 나간 뒤 아버지가 퍼뜩 떠올랐다. 낱말조차 생소했을 아버지는 마치 그 업무에 정통한 사람처럼 점치듯 다 알고 질문한 게 신기해서다. 퇴근해 아버지가 물어본 것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했다. 그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나는 그 업무를 모른다. 네가 얘기해 알았다. 답은 네가 가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상식적으로 궁금한 걸 물었을 뿐이다. 다만 들떠 있길래 그걸 가라앉혀 주고 싶어서였다”면서 “차분함을 잊으면 논리도 함께 잃는다. 준비가 덜 됐으면 섣불리 나서지 않아야 한다”라고 했다. 그날 길게 인용한 고사성어가 삼고초려(三顧草廬)다. 삼국지에서 가장 좋
패싸움에 연루돼 입학한 지 한 달 만에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재수에 들어간 나는 서대문 교도소 뒷산 꼭대기에 방을 얻어 자취했다. 고입 재수학원에 다니는 서울 생활은 온통 신기하기만 했다. 지난해 배운 것인데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낯선 거리 풍경은 볼수록 흥미로웠고 혼자 밥 지어 먹는 재미도 있었다. 그러나 재미난 서울 유학 생활은 딱 거기까지였다. 한 달쯤 지나 생활비를 보내달라고 시골집에 보낸 편지가 돌아왔을 때는 아득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내가 보낸 편지 앞뒤를 온통 붉은 글씨로 지적해 돌려보냈다. 길게 쓰지도 않은 편지에는 고치지 않은 글자가 없었다. 맨 위에 좀 큰 글씨로 ‘고쳐서 다시 보낼 것’이라고 검은색으로 쓰인 글만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돌아온 편지를 벽에 부적처럼 붙여놓았다. 다시 써서 보낸 편지는 정확히 2주 만에 또 되돌아왔다. 저번보다는 덜 고쳤지만, 여전히 붉은색 투성이었다. 며칠을 고심한 끝에 완성한 편지를 또 며칠을 고심하다 학원의 국어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이튿날 돌려받은 내 편지는 파란색으로 고쳐있었다. 고쳐준 대로 ‘氣體候一向萬康(기력과 체력은 그동안 만강)하십니까’로 시작하는 편지를 다시 썼다. 다섯 장이나 돼 두툼한 편지는 통과돼 돈이 같이 왔다. 그러나 아직도 군데군데 붉은 글씨로 지적한 내 편지도 함께 돌아왔다. 돈은 아껴 써도 한 달 살기엔 어려운 절반만 왔다. 생활비가 떨어진 서울 생활은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혹독했다. 매달 내는 학원비는 국어 선생님께 사정을 설명해 도움을 받았다. 종로에 있는 학원까지는 독립문에서 걸어 다녔다. 먹는 게 큰 문제였다. 물만 먹고 이틀을 버
고등학교 1학년 때 성균관대학이 주최한 전국남녀고교생 문예 백일장에서 산문 부문 장원(壯元)을 했다. 시제(試題)는 ‘고양이’였다. 처음 참가하는 백일장이기도 해 떨기만 했던 기억만 난다. 뭘 썼는지 기억은 희미하다. 더듬어 기억을 되살려보니 ‘길 잃은 고양이가 혼자 사는 내 집에 들어와 적적하던 심사를 달래줬다’라는 글이었던 거 같다. 아버지에게 당시 문교부 장관 상장과 트로피를 보여 드렸을 때 크게 기뻐하셨다. 며칠 뒤 대학 신문에 실린 수상작을 읽으시고는 ‘잘 쓴 글’이라며 더 크게 기뻐하셨다. 좀체 하지 않는 칭찬도 하신 기억은 생생하다. 이듬해인 고등학교 2학년 때도 같은 백일장에 참가했다. 그날 백일장이 열린 성균관 명륜당(明倫堂) 앞에 걸린 시제는 ‘비’였다. 마찬가지로 뭘 썼는지는 기억이 흐릿하지만, 그날도 내 글이 장원에 뽑혔다. 상장과 부상을 보여 드렸을 때 아버지는 지난해보다 더 크게 기뻐하셨다. 며칠 지나 ‘비는 인생이다’로 시작하는 내 수상작이 실린 신문을 읽은 아버지는 바로 크게 나무랐다. 그때 하신 말씀이다. “너는 아직 떡잎일 뿐이다. 떡잎이 드리운 그늘이 크면 얼마나 크겠느냐. 인생을 얘기할 나이가 아니다. 네가 쓸 일은 아니다. 억지로 쓴 글은 글이 아니다. 더욱이 그 글로 상을 받고 남들에게 읽게 했다면 패악(悖惡)이다. 이런 글을 쓰지 않을 용기도 있어야 한다.” 이어 아버지는 “세상에 너는 한 사람이면 된다. 너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려고 남을 가르치지 마라. 그에게는 그의 인생이 있다”고 하셨다. 그날 아버지가 말씀 중에 인용한 고사성어가 ‘호위인사(好爲人師)’
들를 데가 많아 첫 휴가를 나와 집에 도착했을 때는 통금이 임박해서였다. 어머니는 맨발로 뛰쳐나와 반겼다. 부모님께 큰절하고 난 뒤 할 말이 많아 말이 엉겼다. 훈련소에서 크림빵 사서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먹던 얘기를 하다 느닷없이 GOP를 아세요? 하며 질문도 했다. 군 생활하며 처음 보고 느낀 놀란 일부터 말했다. 군대 얘기는 부풀려도 먹힌다. 두 분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해 들으셨다. “모택동이 죽어서 군이 비상 중이라 간신히 특별휴가 받아 나왔다”라며 생활에 잘 적응한다고 말씀드렸다. 신나게 말하는 중에 걱정하실 것 같아 “군대 있을 때는 대충하고 제대하면 정말 잘할게요”라는 말을 했다. 아버지는 듣다 말고 재떨이를 내게 던졌다. 너무 갑작스러워 머리를 맞긴 했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뭐? 대충해? 군 생활은 네 인생이 아니고 남의 인생이냐?”라고 역정을 냈다. 아버지는 “세상에 태어나고부터 위기다. 삶이란 위기의 연속이다”라고 전제한 후 “군대 생활이 네 인생에 손해고 위기란 발상이 대체 어떻게 나온 거냐”라고 따져 물었다. “군대가 생긴 이후 수백만 선배들은 모두 잘못 산 삶이냐? 너처럼 군대서 대충 살던 놈은 사회에 나와서도 똑같이 대충 산다”라고 했다. 화가 잔뜩 난 아버지는 내가 꺼낸 모택동(毛澤東) 중국 공산당 주석을 예로 들어 길게 설명했다. 그날 들은 고사성어가 ‘삼복사온(三復四溫)’이다. ‘세 번 반복해 읽고 네 번 익히라’라는 뜻이다. 모택동 자신이 만든 독서법이다. ‘붓을 움직이지 않는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라는 원칙을 그는 굳게 지켰다.
아버지가 나를 불러 들려준 옛이야기다. 남편감을 인사시키면 아버지가 반대해 혼기를 놓친 딸이 “집에만 계시니 갑갑하시죠. 바깥바람 좀 쐬고 오세요. 이 도시락을 꼭 산 좋고 물 좋은 데 있는 정자를 찾아서 드시고 오세요”라고 했다. 딸이 싸준 도시락을 들고 산 좋고 물 좋은 데 있는 정자를 종일토록 찾아 헤맸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딸에게 도시락을 도로 건네주며 “산 좋고 물이 좋은데는 정자가 없고, 정자도 있고 물이 있는 데는 산이 없고, 산 좋고 정자도 있는 데 물이 없더라. 네가 말한 세 가지를 모두 갖춘 데는 찾지 못했다”라고 했다. 딸은 “그런 많지도 않은 세 가지 조건을 맞춘 경승지는 흔치 않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도 찾기 힘듭니다”라고 얘기했단다. 남동생과 여동생 둘을 먼저 혼인시킨 내 아버지는 장남인 나를 불러 역정을 냈다. “내가 그토록 싫어한 게 역혼(逆婚)이다. 그게 불효다. 네가 뭐가 못 나 혼인할 사람을 데려오지 못하느냐? 네가 여러 조건을 따지기 때문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날도 아버지가 어김없이 인용한 고사성어가 ‘완벽(完璧)이다. ‘벽(璧)’은 동그랗게 갈고 닦은 옥(玉)이다. 이 말은 춘추전국시대에 초(楚)나라 변화(卞和)가 발견해 초문왕(楚文王)에게 바쳤다는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운 보옥(寶玉)인 ‘화씨의 벽(和氏之璧)’ 때문에 생겼다. 이 ‘화벽(和璧)’이 조(趙)나라에 흘러 들어갔다. 이를 탐낸 진(秦)나라 왕이 15개 성과 바꾸자고 꾀었다. 힘이 약한 조나라 왕이 대장군 인상여(藺相如)에게 묻자 그가 한 말이다. “진나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전근 발령을 받아 다른 학교로 가게 됐다. 학교서 작별 인사를 끝내고 오자 아버지가 초록색 보자기에 싼 물건을 내주며 선생님께 갖다 드리라 했다. 묵직했다. 몇 걸음 걷다 손을 바꿔가며 들어야 했다. 이삿짐을 다 싼 선생님은 차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자기를 웃으며 건네받은 선생님은 풀어보지는 않았다. 돌아와 잘 전했다고 말씀드리자 “뭐라 하시더냐?”고 되물었다. “아무 말씀도 없고 웃기만 했다”고 하자 아버지는 “내 기분이 이렇게 좋은데 선생님도 틀림없이 좋으실 거다. 선물이란 게 그런 거다. 받는 사람도 즐겁고 준 사람도 기분 좋은 거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작별하고 나서 다시 찾아가니 쑥스러웠을 텐데 이럴 땐 작은 선물이라도 들고 가면 훨씬 마음이 편하다. 손이 부끄럽지 않게 작은 선물을 들고 가라. 공자(孔子)가 이미 한 말이다”라고 하셨다. 훗날 나이 들어 찾아본 고사성어가 속수지례(束脩之禮)다. ‘묶은 육포의 예절’이라는 말이다. 스승을 처음 만나 가르침을 청할 때 선물함으로써 예의를 차린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술이(述而)편에 나온다. 공자가 한 말에서 유래했다. “속수 이상의 예를 행한 자에게 내 일찍이 가르쳐주지 않은 바가 없었다[自行束脩之以上 吾未嘗無誨焉].” ‘속수’는 열 조각의 말린 고기다. 육포를 말한다. 예물 가운데 가장 약소한 것이다. 공자는 모든 가르침은 예(禮)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가장 작은 선물인 속수로 예물을 가지고 오게 해 제자의 예를 지키도록 했다. 아버지는 논어의 이 구절을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 몇 번이
뭘 잘 못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벌 받은 기억은 생생해도 잘못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방 문을 박차고 달려나가 맨발로 도망쳤다. 아버지의 화난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까지 골목길을 뛰었다. 이젠 됐다 싶어 숨을 고르며 뒤돌아보니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뒤쫓아왔다. 골목을 빠져나와 밭길로, 논길로 내달렸다. 아버지가 따라오며 뭐라고 하셨지만, 똑똑히 듣질 못했다. 큰길로 들어섰을 때는 거의 잡힐뻔했다. 산 쪽으로 난 언덕을 숨차게 뛰어오를 때다. 뒤에서 쿵 하며 비명이 들려 돌아보니 아버지가 자전거와 함께 나뒹굴었다. 잘못됐을까 봐 어린 마음에 겁이 덜컥 나 달려가 일으켜 세웠다. 머리를 한 대 쥐어박은 아버지는 내 손을 이끌어 앉혔다. 둘은 서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을을 내려다보고 나란히 앉았다. 그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남과 경쟁할 때 절대 먼저 포기하지 마라. 네가 지치면 마찬가지로 상대도 당연히 지친다. 먼저 포기한 쪽이 지는 거다.” 그때 말씀하신 것 중에 ‘화살도 힘 떨어진다’라고 하신 게 생각나 찾아봤다. 강노지말(强弩之末)이란 고사성어다. 힘센 쇠뇌에서 튕겨 나간 화살도 마지막에는 얇은 천조차도 뚫지 못한다는 말이다. 강한 군대도 원정(遠征)을 가면 지쳐서 군력(軍力)이 약화한다는 뜻이다. 한서(漢書) 한안국전(韓安國傳)에 나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한(漢)나라를 세운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한나라보다 몇 배의 군사력을 지닌 초(楚)나라 항우(項羽)를 패배시킨 후, 흉노(匈奴) 정벌을 위해 출전했다가 포위되고 말았다. 이때 진평(陳平)의 묘책으로 포위망을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한 고조는 흉노와
설날 아침 큰댁에 차례를 지내러 갔다. 초등학교 4학년 때다.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 걸음으로 30분 걸리는 새벽길을 걸었다.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를 지날 때다. 멈춰 선 아버지가 지팡이로 가리키며 “숨구멍이 저기 있었구나”라고 했다. 저수지 산 쪽 끝에 얼지 않은 물 위에 오리들이 떠 있는 게 보였다. “저기만 왜 안 얼었는지 아느냐?”고 질문한 아버지는 내가 미처 답하기 전에 이유를 설명해 버렸다. “물이 들어오는 데는 살얼음만 낀다. 영리한 오리들이 저수지가 다 얼어버리지 않게 밤새 순번 정해 빙빙 원을 그리며 헤엄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도 설날에 저수지 둑길을 걸었다. 어릴 적에 들었던 ‘저수지 숨구멍’이 기억나 여쭸다. 그날 아버지의 긴 설명을 옮기면 이렇다. 저수지도 생물이다. 강추위에 모두 얼어붙었으니 저수지가 숨은 어떻게 쉬나 궁금했다. 마침 오리들이 숨구멍을 얼지 않게 밤새 돌고 있는 게 신기했다. 미물도 저런 지혜로 저수지를 살리고 있는 걸 그때 알았다. 아버지는 “저수지는 물을 가리지 않는다. 맑은 물이나 흙탕물이라도 다 받아들인다. 깨끗하다 해서 좋아하고 더럽다고 차별하지 않는다. 저수지 반대편으로 빠져나가는 물은 깨끗하게 정화돼 흘러간다. 사람은 사람 속에서 살아야 사람이다. 인간(人間)이라는 한자가 잘 표현하고 있다. 나 홀로 저수지를 만들 수 없듯이 모든 일은 혼자 다 해 이루는 것이 아니다. 저 오리들처럼 말하지 않아도 도와주는 이가 있어서 일이 이루어진다”라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운 아버지는 고사성어와 인물 그리고 전적(典籍)을 말씀하실 적마다 자식이 알아들었는
“구두 닦아 신고 다녀라.” 은행에 입행해 첫 출근 인사드릴 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딱 그 한마디만 하셨다. 모든 게 서툴러 정신없이 지내느라 잊고 있다 며칠 지나 지점 앞 구두 수선집에 구두를 닦아달라 했다. 구두를 이리저리 들춰본 주인이 몇 군데 손봐야 한다고 해 그러라고 했다. 얼굴이 비칠 만큼 반짝이는 구두를 건네받아 신고 몇 걸음 걸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내 구두만 쳐다보는 거 같아 발가락이 옴츠려 들었으나 발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자세가 바로잡아지니 걸음걸이가 달라졌다. 동료들의 광택 나는 구두도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퇴근 무렵에는 구두를 빼고 동료들은 모든 게 나와 다른 모습인 걸 알아챘다. 좋아하던 흰색을 버리고 검은색 양말로 바꿔 신으며 거기에 맞춰 양복이며 심지어 말투까지 모두 동료들과 어울리게 바꿨다. 며칠 뒤 출근 인사드릴 때 나를 둘러보던 아버지가 차고 있던 커프스 버튼을 풀어 줬다. 양복 주머니에 꽂은 작은 머리빗도 꺼내주며 하신 말씀이다. “마름(지주로부터 소작지의 관리를 위임받은 관리인) 일을 해 우리 집을 일으킨 네 고조부가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지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며 네 할아버지가 나를 똑같이 가르쳤다.” 그렇게 시작한 말씀이 그날은 길어 결국 출근이 늦었다. 96세로 장수한 고조부는 82세에 첫 손자를 얻었다. 고조부는 42세에 첫 아이를 얻은 증조부를 제치고 손자인 내 할아버지를 직접 혹독하게 가르쳤다. 남긴 말씀이 ‘용모단정(容貌端正)과 의관정제(衣冠整齊)’다. 그게 상대를 존경하고 상대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는 신호라고 고조부는 손자에
제천역에 기차를 내리자마자 동생과 함께 서둘러 시발택시를 탔다. 시발(始發)택시는 당시 유행하던 지프를 개조한 우리나라 최초의 택시다. 동생이 초등학교 1학년, 내가 4학년 때다. 탄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택시를 내렸다. 둘이 뛰어서 중국집에 들어갔다. 자장면을 처음 먹어보는 동생은 면을 입에 가득 물고 연신 맛있다며 좋아했다. 내가 더 좋았다. 며칠 뒤 저녁 먹을 때 어머니가 얘기를 꺼냈다. “얘들이 제천에 기차 타고 가서 택시를 탔답디다. 장에 가던 동네 사람들이 봤다면서 ‘애가 되바라지다’고 수군댄다고 얘기를 전해주더라구요”라고 했다. 아버지는 왜 택시를 탔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내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동생에게 자장면을 사주기 위해 빨리 가려고 탔다고 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들고 있던 숟가락으로 밥상을 세게 내리치며 “참 잘했다. 잘했어. 앞으로도 꼭 그렇게 해라”라고 했다. 그리고는 더 말씀이 없었다. 몇 년 뒤 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와 그 중국집에 갔다. 식사를 마칠 즈음 그날을 떠올리며 아버지가 처음 칭찬해줬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칭찬받을 일을 했다. ‘동기간에 우애가 있어야 한다’고 명령한다고 따르지 않는다. 가르치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스스로 깨우쳤으니 마땅히 칭찬받을 일이다”라고 했다. 아버지가 이어 가르쳐준 고사성어가 ‘녹명(鹿鳴)’이다. 녹명은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다른 사슴을 찾아 부르는 울음소리다. 중국 시가집 시경(詩經) 소아(小雅) 편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은 ‘유유녹명 식야지평[呦鹿鳴 食野之苹]’. 사슴이 기쁜 울음소리를 내 먹이 있는 곳을
난생처음 서울 남산에 올랐다. 올랐다기보다 ‘갔다’가 맞다. 부모님과 케이블카를 타고 갔으니 말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다. 같은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동생과 함께다. 까만 교복을 입은 두 아들을 쳐다보며 아버지가 좋아했다. 남산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서울은 한양 조씨 본향이다. 9대 말손(末孫) 할아버지 때 ‘벼슬길에 나서지 말라’는 선조의 유훈을 좇아 충주를 거쳐 14대 진(瑨) 할아버지 때 제천을 세거지(世居地)로 삼았다. 내가 25대니 거의 500년 유훈을 받들었으면 됐다 싶어 서울로 왔다. 이제부터 내가 ‘서울 조씨’ 시조다.” 서울로 온 지 1년 되는 날 두 아들을 데리고 남산을 찾은 아버지는 하고 싶은 말씀을 이어갔다. “내가 서울에 보따리를 풀어놨다. 너희는 서울을 시작으로 전 세계 어디든 살고 싶은데 가서 살아라.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해라. 너희 앞날을 발목 잡고 싶지 않다.” 아버지는 좌청룡 우백호(左靑龍 右白虎) 풍수를 따라 지은 경복궁을 가리켰다. 왼편의 인왕산과 오른쪽의 낙산을 가리키던 아버지는 임금이 앉은 자리에서 보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것과 좌우가 다르다고 설명했다. 아버지는 ‘나를 중심으로 보되 언제나 상대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통치자는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아 한쪽에서만 보려 한다고도 했다. 보고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고도 했다. 이편에서는 옳지만, 저편에서 보면 틀릴지도 모르니 언제나 올바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끝에 ‘~보다’가 붙은 말이 많은 건 그만큼 보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냥 보다’가 아니라 ‘똑바로 보다’가 중
아버지 애창곡은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공원’이었다. 29세에 요절한 그가 절규하듯 불렀다. 그 노래를 아버지가 부르는 걸 몇 번 들었다. 전상을 입어 다리를 절단한 아버지는 절망 속에서 오랜 병원 생활을 견뎌내는 중에 억척스레 노래 공부를 했다. 스승을 모셔 실력을 갖춘 아버지는 노래자랑 대회에서 몇 차례 수상했다. 그때 수상 곡은 백난아의 ‘찔레꽃’. 기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도 했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장충단공원은 조선 시대 도성 남쪽 수비군이 주둔한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자리다. 명성황후 시해 때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1900년 고종황제가 ‘장충단(奬忠壇)’을 세웠다. 글씨는 순종이 썼다. 해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 대한제국의 국립현충원이었다. 1910년 일제는 자신들의 흑역사를 담은 장충단을 폐사해 공원으로 만들었다. 아버지는 장충단공원에서 전국상이군경 임의단체를 조직하고 대표로 선출돼 ‘국가도 백성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며 연설했다. 1991년이었다. 왕조시대에도 나라가 은혜를 입으면 장충단을 세워 기렸다며 민주공화국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의 처우가 부당하다고 역설했다. 연설이 끝나자 감동한 청중 중 한 사람이 저 노래를 처연하게 부르자 모두 따라 불렀다고 한다. 몇 년에 걸친 법정투쟁 끝에 ‘국가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전면개정으로 아버지의 뜻은 관철돼 지금의 보상체계가 갖추어졌다. 아버지는 그날 이후 애창곡이 저 노래로 바뀌었다고 했다. “지난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라는 노랫말을 쓴
어릴 때 싸움은 코피가 나면 끝난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다. 그날도 그랬다. 나보다 한 뼘이나 키가 더 큰 동급생에게 얼굴을 한 대 맞자마자 바로 코피가 터졌다. 집에 오자 아버지가 이유를 물었다. 나이는 한 살 위지만 한 해 꿇어 같이 다니는 동급생이 형이라고 안 한다며 때렸다고 했다. 아버지는 더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세 아들을 두신 할아버지는 돌림자를 빼고 가운데 글자를 큰아들은 ‘헤엄칠 영(泳)’을, 둘째인 내 아버지는 ‘근원 원(源)’을, 막내에겐 ‘물 솟아 흐를 규(湀)’자를 각각 넣어 이름을 지었다. 아버지는 가장 좋아하는 글자가 ‘물 수(水)’자인 할아버지가 자식의 이름에 모두 물이 들어가는 글자를 넣었다고 했다. 집 대문의 문패가 ‘원행(源行)’과 ‘중행(仲行)’ 두 개가 걸려있었으나, 중학교 입학하고 호적등본을 떼 학교에 낼 때 아버지 이름이 바뀐 걸 제대로 알았다. 1957년. 할아버지가 47세에 돌아가신 그해 분가한 아버지는 아명(兒名)인 ‘근원 원(源)’을 버리고 ‘버금 중(仲)’자로 바꿔 개명했다. 호적등본은 그날 분가와 혼인신고, 첫째인 나와 56년생인 동생의 출생신고를 한꺼번에 했다고 나온다. 내 고조와 증조부는 97세, 80세로 장수했다. 두 분은 마흔 살이 넘어 자식을 얻었다. 할아버지는 큰아들을 18살에 얻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자식 이름 작명을 이렇게 풀이했다. “아마 너희 할아버지는 많이 어려워하신 거 같다. 그래서 큰아들 이름에 ‘네 마음대로 세상을 헤엄쳐 살아라’란 뜻을 담은 거 같다. 두뇌가 비상하고 탐구심 강한 막내는 샘솟는 물처럼 지혜롭게 살라는 뜻을 이름에
학교 운동장에서 줄달음치다 철봉에 이마를 부딪쳐 뒤로 넘어졌다.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이마에서 뜨끈한 게 얼굴을 타고 흘렀다. 바로 일어서긴 했지만, 친구들이 소리쳤다. 피범벅이 된 내 얼굴을 보고서다. 덩치 큰 친구가 나를 업고 집으로 내달렸다. 그제야 통증이 밀려와 울음이 났다. 따라 울던 아이들이 번갈아 가며 업었다. 소식이 먼저 갔다. 대문 앞에서 아버지가 업혀 온 나를 내려놓으라 하고 피 흐르는 상처를 뜯어 봤다. 아버지는 바로 내 뺨을 후려갈기면서 큰소리로 야단쳤다. “칠칠치 못한 놈, 이런 거로 업혀 다녀? 걸을 수 있으면 네 다리로 걸어갔다 와라!” 놀란 나는 학교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왔다. 친구들도 수군대며 따라 걸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눕히고 뜨거운 물수건으로 상처를 닦은 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상처를 실로 꿰맸다. 상처는 쉬이 아물었지만, 기억은 오래간다. 이마 왼쪽에 상처 났던 부위는 60년이 흘러도 만지면 아리고 추울 땐 유독 시리다. 당신이 쓰던 바늘과 실로 자식의 상처를 꿰매는 그 날의 충격을 본 어머니의 기억은 더 오래갔다. 툭하면 내 이마를 만졌다. 몇 년 지난 어느 날에도 어머니가 “당신이 의사예요?”라고 그날을 떠올리며 힐문했다. 답을 하지 않은 아버지는 방에 걸린 관우(關羽) 장군의 괄골요독(刮骨療毒) 족자를 내게 가리키며 그림을 설명했다. 그림은 관우가 적군이 쏜 독화살로 입은 어깨 상처를 수술받는 장면이다. 관우가 독이 퍼져 뼈를 긁어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량(馬良)과 바둑을 두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진정한 사내의 모습은 저렇게 나무기둥처럼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아버지가 콩기름 병마개를 발명했다. 기름을 따를 때 찔끔 흘러내리는 건 아까워서라기보다 손에 묻으니 짜증 나서다. 어머니가 기름을 부을 적마다 손을 몇 번씩이나 닦아내는 걸 본 아버지가 병마개를 고쳐주려고 나섰다. 알코올램프를 사다 플라스틱에 열을 가해 손으로 만져가며 병 주둥이에 모양을 냈다. 마개 끝을 길쭉하게 혹은 더 짤막하게, 뾰족하거나 세모꼴로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마개를 끼워 기름을 부었으나 모두 허사였다. 기름이 여전히 병 주둥이를 타고 흘렀다. 며칠을 반복해도 실험은 언제나 실패했다. 오기가 생긴 아버지는 일을 멈추고 마개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 콩기름 병뿐 아니라 빈 기름병은 모두 어머니가 수거해 날랐다. 어느 기름이나 따른 끝에는 지질하게 밖으로 흘러내렸다. 지천에 널린 동네 기름병을 수거해오는 것은 그렇다 쳐도 버리는 게 더 어려웠다. 많이 태웠지만 마당은 온통 빈 기름병 투성이었다. 더욱이 실험하다 버린 기름이 부엌에 넘쳐나자 어머니는 아무나 발명하는 줄 아느냐며 투덜댔다. 생전 처음 보는 플라스틱 관련 책, 유체역학이란 책도 독파하며 실험에 몰두하던 아버지도 부아가 나서 실험도구를 불태우기도 했다. 어느 날 밤새 꼬박 연구하던 아버지가 잠깐 조는 사이 기름병을 넘어뜨렸다. 쓰러진 기름병에서 흘러나오던 기름이 멈췄고 더는 지질하게 새어 나오지 않았다. 2년이나 걸린 실험은 무위에 그쳤지만 발명은 순간에 이루어졌고, 간단했다. 병마개를 넓혀주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따르는 양이 많아지면 장력에 의해 기름이 똑 끊어지며 더 흐르지 않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2년여 만에 그렇게 우연히 흐르지 않는 병마개를 발
신혼 초 부모님과 함께 살던 본가에 복면강도 둘이 침입했다. 산에 붙은 베란다를 타고 넘어 들어온 강도가 흉기로 어머니와 만삭의 아내를 위협했다. 강도들은 결혼 패물을 비롯해 어머니가 끼고 있는 반지마저 빼앗아 현관을 통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어머니는 첫애를 잉태한 아내의 배를 쓸어 만지며 다친 데 없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자고 다독이셨다. 한참 만에야 간신히 걸음을 뗀 어머니가 아래층에 계신 아버지께 강도가 든 사실을 알렸다. 아내가 퇴근 후에야 강도가 든 얘기를 저렇게 했다. 부모님이 직장까지 전화해 놀라게 하지 말라고 해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를 뵙자 하신 첫 마디가 ‘부끄럽다’였다. 아래층에 있으면서 기척조차 못 느낀 자신의 무력함을 지나치리만큼 크게 자책하셨다. 하시던 회사가 부도난 내력, 그래서 내 결혼 때 당시 유행하던 롤렉스 예물시계를 사주지 못한 데 이르기까지 그동안의 회한을 함께 털어놓으셨다. 몇 번이나 만류했으나 저녁도 거르며 ‘부끄럽다’라는 말만 반복하셨다. “동물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끄러워해야 사람이다. 부끄러워하는 건 양심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더 나은 길을 가게 하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다음날 출근 인사를 드릴 때 아버지 책상 위 노트에 적힌 글귀를 우연히 봤다. ‘무괴아심(無愧我心).’ 수첩에 적어와 찾아본 고사성어다. 중국 명(明)나라 정치가이자 시인인 유기(劉基)가 한 말이다. 원문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다만 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기를 구할 뿐이다[豈能盡如人意 但求無愧我心]”라는 말
내가 여섯 살 때다. 남동생까지 낳은 뒤 분가한 아버지는 산을 개간(開墾)해 밭을 일구셨다. 해 뜰 때부터 해 질 녘까지 몇 날을 땀 흘려 일하신 부모님은 우리 다섯 식구가 충분히 먹을 수 있는 큰 밭을 마련했다. 분가한 뒤 태어난 돌 지난 여동생을 업고 점심으로 감자를 삶아 밭에 갔던 기억이 새롭다. 동생과 돌멩이를 골라 밖에 내다 버리며 개간 일을 도운 기억도 또렷하다. 일이 거의 끝날 무렵, 무슨 일 때문에 아버지가 화가 몹시 났는지는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 다만 아버지가 뒤에서 내 다리를 양손으로 잡고 들어 올려 큰 나뭇가지를 잡으라고 한 기억은 생생하다. 내려다보니 떨어지면 죽을 것처럼 높았다. 아버지는 나무에 매달린 나를 두고 말리는 어머니를 끌다시피 산을 내려가 버렸다. 땅과 부모님을 번갈아 쳐다보며 큰 소리로 울었다. 사방이 어두워졌을 때는 무서워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울음이 더는 소용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나뭇가지 잡은 팔을 힘껏 당겨 다리를 나무에 걸쳤다. 그렇게 팔다리를 움직여 몸을 밀어 나무를 내려왔다. 집에 돌아온 나를 본 어머니는 울기만 했고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곤한 잠을 자다 잠결에 누군가 내 팔다리를 만진 기억은 희미하지만, 그때 맡은 아버지 담배 핀 입 냄새는 지금도 기억난다. 아버지는 ‘절벽을 잡은 손을 놓는다’라는 뜻의 ‘현애살수(懸崖撒手)’ 고사성어를 자주 쓰셨다. 그때마다 어릴 적 나뭇가지에 매달리게 했던 기억이 되살아났지만, 아버지는 거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당신의 자식이 외울 수 있을 만큼 여러 번 설명했다. “여러 불경에 나오는 말이다. 손 떼면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같은 교정에 있는 고등학교에 당연히 진학할 줄 알았다. 입시를 앞둔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심하게 다투셨다. 화를 참지 못한 아버지는 집안 살림을 모두 부숴버렸다. 그러곤 깨진 그릇 조각들이 널린 방으로 나를 불러 "서울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여느 때 같으면 꿇어앉히고선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으셨을 텐데 그날은 딱 그 한마디뿐이었다.며칠 뒤 아버지가 정해준 서울의 고등학교에 가서 입학시험을 봐 합격했다. 합격증을 받아 집에 돌아와서야 어머니께 내가 서울로 가게 된 속사정을 들었다. "그 여편네한테 널 맡겨놓고 서울을 제집 드나들 듯하려는 게지." 자식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심정이었을 어머니의 목소리엔 울분과 설움이 묻어 있었다.당시 아버지는 화강암을 채석해 서울로 실어 보내는 사업을 하셨다. 서울 남산 석축의 질 좋은 화강암은 아버지가 납품한 것들이다. 서울에서 지내는 날이 많았던 아버지에게 여자가 생겼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서울에 다녀오시는 날엔 어김없이 우리집에 싸움이 났다. 다행히 고등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아버지는 그분과 헤어졌는지 나를 외숙모댁에 맡겼다. 내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오게 된 연유다.우리집에 평화가 찾아온 후 아버지는 내게 서울 진학에 관해 뜻밖의 이야기를 하셨다. 고사성어 '동산태산(東山泰山)'을 말씀하시며 서울로 가야 하는 이유를 강조했다. 이 성어는 그때이후 아버지께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공부하라'는 말은 거의 들은 적이 없다. 아마 이 고사성어를 인용하신 자체가 학업 독려였던 거 같다.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사자성어라 당신의 수첩은 물론 책상 앞에도 정
일곱 살에 들어간 초등학교 입학식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밖엔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다만 행사가 끝난 뒤 어머니와 제천 경찰서에 수감된 아버지 면회를 갔던 기억은 또렷하다.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온 어머니를 유치장이 떠나갈 만큼 큰소리로 야단쳤기 때문이다. 지인의 무고(誣告)로 조사를 받느라 아버지가 입학식에 오시지 못했다는 얘기는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께 들었다.그렇게 소리치던 아버지가 껄껄껄 웃으며 저만큼 물러서 있는 나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셨다. 쇠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몇 번이고 다독여줬다. 나는 그게 아버지가 자식을 칭찬하는 방식임을 알았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왜 웃으셨냐고 어머니께 물었다. 아버지가 입학식이 어땠느냐고 묻기에 교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한마디씩 질문하며 면접을 봤다고 하셨단다. 내게는 "소금이 짜니 싱겁니?" 하고 물었는데 당당하게 "싱거워요"라고 답을 했다고 하자 아버지가 크게 웃으셨다고 했다.몇 해 지나 불현듯 그때 생각이 떠올라 아버지에게 왜 그날 크게 웃으셨느냐고 여쭸다. 그때 하신 말씀. "영어(囹圄)의 몸이 돼 아비 노릇을 하지 못한 걸 네가 힐난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그 또한 나답지 못한 언행에서 비롯된 걸 깨닫게 해줬기 때문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소금이 아니듯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면 아버지가 아니다. 이름에 맞는 정체성을 갖추는 노력은 한시 반때라도 게을리해선 안 된다."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은 '명(名)을 바로잡는다'라는 뜻인 '정명(正名)'이다. '대상의 이름과 그 본질이 서로 부합해야 한다'라는 말이다.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