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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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과 사별하고 부쩍 기력이 약해진 주소흠 씨는 생(生)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를 어떻게 모실 것인지에 대해 자녀들의 의견이 다르네요. 첫째 자녀인 하나 씨는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직접 모시기 쉽지 않으니 요양병원에 보내자는 입장입니다. 반면 둘째인 둘희 씨는 자식된 도리로 직접 모시는 게 맞다는 겁니다.

하나 씨는 아버지를 모실 생각이 전혀 없는지라, 둘희 씨가 자신의 집에서 아버지를 모시기로 했습니다. 서울 강남구 일원동 123번지의 큰 집에서 혼자 거주하고 있던 주소흠 씨를 둘희 씨의 강동구 암사동 456번지의 집으로 모셔왔지요. 주소흠 씨는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첫째인 하나 씨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숨길 수 없습니다. 주소흠 씨는 자신을 끝까지 봉양하겠다는 둘째 둘희 씨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기로 합니다.

주소흠 씨가 작성한 유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 주소흠은 강남구 일원동 소재 주택과 대치동 소재 상가를 포함하여 재산목록에 기재된 모든 재산을 주둘희에게 물려준다.

2020. 1. 10. 암사동에서 주소흠 씀

자신이 작성한 것이 분명하도록 모두 자필로 기재했고, 인감도장까지 날인했습니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난 후 주소흠 씨는 생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주소흠 씨의 유언장의 내용을 두고 자녀들 사이에서 다툼이 있네요. 둘희 씨는 아버지의 뜻대로 전 재산을 자기가 상속받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필요하다면 하나 씨에게 유류분(전 재산의 1/4)까지는 양보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는 입장이지요. 반면에 하나 씨는 유언장이 무효이기 때문에 법정상속비율에 따라 1/2씩 나눠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누구 말이 맞는 것일까요?
[그림 - 이영욱]
[그림 - 이영욱]

유언장 작성, 제대로 하는 방법

민법상 유언의 방식은 자필증서, 녹음, 공정증서, 비밀증서, 구수증서의 5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일반인들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자필증서입니다. 피상속인이 자신의 손글씨로 유언의 내용을 작성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자필증서의 방식이 생각 외로 까다롭다는 겁니다. 우리 민법에서는 자필증서가 효력을 발생하기 위한 요건으로 아래의 5가지 내용을 모두 자서(自署)할 것을 요구하고 있어요.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유언은 무효가 됩니다.

1. 전문(全文)
2. 작성연월일
3. 주소
4. 성명
5. 날인
민법

제1066조(자필증서에 의한 유언) ①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은 유언자가 그 전문과 연월일, 주소, 성명을 자서하고 날인하여야 한다.
② 전항의 증서에 문자의 삽입, 삭제 또는 변경을 함에는 유언자가 이를 자서하고 날인하여야 한다.
주소는 유언자의 생활의 근거지이면 되고, 반드시 주민등록법에 의해 등록된 곳일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주소흠 씨가 주민등록지인 강남구 일원동 123번지가 아니라 현 거주지인 암사동 456번지를 써도 됩니다.

문제는 주소흠 씨가 번지까지 정확히 쓴 것이 아니라 “암사동에서”라고만 기재한 겁니다. 암사동 땅 전부가 주소흠 씨의 집은 아니지요. 그래서 주소를 “암사동에서”라고만 기재하면 유언의 효력이 없다는 것이 대법원 판례의 입장입니다.
[대법원 2014. 9. 26., 선고, 2012다71688, 판결]

민법 제1065조 내지 제1070조가 유언의 방식을 엄격하게 규정한 것은 유언자의 진의를 명확히 하고 그로 인한 법적 분쟁과 혼란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므로, 법정된 요건과 방식에 어긋난 유언은 그것이 유언자의 진정한 의사에 합치하더라도 무효이다. 따라서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은 민법 제1066조 제1항의 규정에 따라 유언자가 전문과 연월일, 주소, 성명을 모두 자서하고 날인하여야만 효력이 있고, 유언자가 주소를 자서하지 않았다면 이는 법정된 요건과 방식에 어긋난 유언으로서 효력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유언자의 특정에 지장이 없다고 하여 달리 볼 수 없다. 여기서 자서가 필요한 주소는 반드시 주민등록법에 의하여 등록된 곳일 필요는 없으나, 적어도 민법 제18조에서 정한 생활의 근거되는 곳으로서 다른 장소와 구별되는 정도의 표시를 갖추어야 한다.
(중략)
위와 같은 사실관계를 앞서 본 법리에 비추어 살펴보면, 설령 망인이 원심 인정과 같이 원고의 위 암사동 주소지에서 거주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더라도, 망인이 이 사건 유언장에 기재한 ‘암사동에서’라는 부분을 다른 주소와 구별되는 정도의 표시를 갖춘 생활의 근거되는 곳을 기재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사건 유언장은 주소의 자서가 누락되어 법정된 요건과 방식에 어긋나므로 그 효력이 없다고 할 것이다.
유언장의 5가지 필수적 기재사항 중에서 다른 부분들은 쉽게 동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소를 반드시 기재해야 한다는 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듭니다. 일반인의 법상식과 괴리가 있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외국의 경우 자필유언장에 주소의 기재까지 요구하는 나라는 찾기 어렵습니다. 독일은 전문의 자서와 서명만 있으면 되고(2가지), 프랑스는 날짜 기재까지 추가합니다(3가지). 일본은 날인까지 있을 것을 요구합니다(4가지). 그런데 우리나라는 더 나아가 주소기재까지 요구하고 있네요(5가지).

이렇게 과도하게 까다로운 민법 조항에 대해서 여러 차례 위헌 여부가 문제되었습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문제가 없다고 반복해서 결정하고 있습니다. 입법론적으로는 개정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개정 전에는 현행법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주소를 기재하지 않은 주소흠 씨의 유언장은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주하나 씨와 주둘희 씨는 아버지의 뜻과 무관하게 법정상속비율에 따라 1/2씩 상속을 받게 됩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정인국 한서법률사무소 변호사/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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