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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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이맘 때가 되면 지역 내 어려운 이웃들을 돕기 위해 거액을 기부하는 익명의 기부천사가 있어 감동을 주고 있다. 기부자는 자신이 누구인지는 한사코 밝히기를 거절하며, (중략)”
연말연시가 되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자주 듣는 훈훈한 뉴스입니다. 교장으로 은퇴한 도내선씨는 바로 위 신문기사의 주인공 중 하나였습니다. 자식들은 물론 주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매년 자선단체에 익명으로 기부해왔습니다. 도내선씨는 이른바 '얼굴없는 천사', '익명의 기부천사'인 셈이었습니다.

최근 지병으로 거동이 부쩍 불편해진 도내선씨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습니다. 죽기 전에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마음먹었지요. 자녀들은 이미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자리를 잡은 터라, 심적 부담도 적었습니다. 도내선씨는 살고 있던 집과 상가를 매각해서 20억원을 마련하고 자선단체에 모두 익명으로 기부했습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사망 후 상속재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최근 2년 동안 20억원의 거액이 인출된 사실을 확인하고 아연실색했습니다. 자녀들끼리 서로 사용처를 물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했네요. 어머니와 일찍 사별한 아버지가 자녀들 모르게 애인을 만들었나 생각해 보았지만, 그런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자녀들은 상속세 신고기한까지 자금의 사용처를 끝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담당 세무사의 말로는 자녀들이 상속받은 것으로 추정돼 과세된다고 합니다. 억울한 생각이 든 자녀들은 세무서에 민원을 제기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상속받은 재산도 없는데 상속세가 3억원 가까이 부과됐습니다. 자녀들은 자기들 개인재산으로 상속세를 납부해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림 - 이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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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처 불분명한 금전지출, 자녀들이 상속받은 것으로 추정과세

세법에서는 사망하기 전 일정 기간 내에 피상속인(망인)의 재산이 일정 금액 이상 처분되거나 채무가 증가한 경우, 사전에 재산을 빼돌려 편법적으로 상속한 것으로 추정해 과세할 수 있는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이를 '상속개시일 전 처분재산의 상속추정'이라고 합니다

상속 개시일(사망일) 전 1년 이내에 2억원 이상, 2년 이내에 5억원 이상의 재산을 처분하거나 예금을 인출하거나 채무를 부담한 경우를 대상으로 합니다. 그 자금을 어디에 사용했는지 밝히지 못하면 상속재산으로 추정해 상속세를 과세합니다. 다만 사용처가 불분명한 금액 전액을 상속재산에 포함하는 것은 아니고, 2억원 범위 내에서 일정 금액은 차감합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사용처가 불분명한 금전 지출액이 10억원을 넘을 경우에는 2억원을 뺀 나머지 금액을 자녀가 상속받은 것으로 추정하는 겁니다.

이 사건에서 기부천사 도내선씨가 돌아가시기 전에 익명으로 기부한 금액은 2년간 20억원이지요. 관할 세무서에서는 자녀들이 18억원을 상속받았다고 추정해서 이에 따른 상속세를 부과했습니다. 다른 요소를 배제하고 상속으로 추정한 금액만 놓고 보면 18억원에 대해 대략 2억6000만원의 상속세가 과세됩니다. 상속추정금액이 커지게 되면 내야 할 상속세의 액수가 늘어남은 물론입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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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반전이 있었습니다. 자녀들이 유품을 정리하다가 자선단체로부터 받은 감사편지를 찾은 겁니다. '기부금 전자영수증' 제도라고 해서, 해당 자선단체는 익명기부 내역을 국세청 홈택스 전산망에 빠짐없이 입력해두고 있었습니다. 자선단체가 해당 인물이 실제 익명 기부자인지 판단해 홈택스에서 '실명 기부자'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은 도내선 씨가 20억원을 익명으로 기부했다는 점을 입증해서 자선단체로부터 전자영수증을 받았습니다. 상속세도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나이 들어서 쓴 돈, 기록 꼭 남겨야"

기부를 할 때는 생색을 내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드러내는 편이 낫습니다. 기부금 영수증은 반드시 챙겨두고 종합소득신고를 할 때에는 기부금 공제도 신청해야 합니다.

비단 기부만은 아닐 겁니다. 나이가 들어서 쓰는 돈은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황혼의 문턱에 서면 정리해야 할 일이 많아집니다. 과거에 은혜를 베풀어준 지인에게 늦었지만 보답도 하고, 자신의 지난 과오에 대한 반성의 뜻으로 누군가에게 금전으로 보상할 수도 있습니다. 챙겨야 할 경조사도 많습니다. 이 모든 경우에 금전지출을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겁니다.

피상속인의 생전 지출에 대해 납득할 만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으면, 과세관청은 이를 사용처가 불분명한 지출이라 해서 사망 이전에 자녀에게 현금으로 넘겨준 것으로 추정합니다. 자녀가 그 사용처를 입증하지 않으면 상속세의 부담은 고스란히 자녀가 떠안게 됩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더라도, 굳이 부담할 필요가 없는 세금은 피하는 게 맞습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정인국 한서법률사무소 변호사/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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