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게 파라…스페셜리스트가 돼라 [이윤학의 일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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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머니이스트
열 세번째 이야기
열 세번째 이야기
저의 첫 직업은 애널리스트입니다. 사실 저는 애널리스트가 뭘 하는 사람인지 대학교 3학년 때 처음 알았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오매불망 키워온 꿈은 아니었지요. 군대를 다녀와 복학 후 열심히 공부할 요량으로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우연히 어느 언론사에서 ‘대학생 기고문 대회’를 하는 겁니다. 사실 제 관심을 끈 것은 상금이었습니다. 용돈이 궁하던 차에 ‘밑져야 본전인데, 한번 해볼까?’하는 마음에 원고지 10매 분량의 기고문을 냈지요. 잿밥에 눈이 어두워 지금은 제목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항공 산업의 경제적 이슈에 대해 썼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입상을 한 겁니다. 우체국 전신환으로 상금을 받았는데, 너무 기뻤습니다. 상금도 상금이지만 ‘누군가 내 글을 읽고 가치를 알아주는구나’란 생각에 마음이 붕 떴지요. 이게 제 인생에서 애널리스트로서의 출발점인 것 같습니다. 내가 분석하고 주장한 것을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는 것, 그 자체에 매력을 느꼈는데 애널리스트가 하는 업무가 바로 그런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증권 회사에 입사하기로 마음을 먹었지요.
제가 입사한 시절은 우리나라 주식 시장의 10년간 대활황이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코스피가 100포인트에서 1000포인트까지 무려 10배가 올라, 투자자는 물론 증권사 직원까지 흥분해 있던 시기였습니다. 주가가 조금 하락해도 미래를 믿고 투자하던, 소위 ‘땅 팔고 집 팔아서’ 주식 투자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신입 사원들의 1순위 지원은 당연히 본사 근무가 아니라 지점 영업이었습니다. 그래야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저도 첫 1년을 지점에서 근무했습니다. 하지만 애널리스트의 꿈은 변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욱 굳어졌지요. 저는 당시 투전판 같던 지점 영업이 싫었습니다. 제대로 공부하고 제대로 투자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1년 만에 본사 근무를 지원하자, 다들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거지요. 그래도 좋았습니다. 공부하고 그 내용을 시장에 적용해 보고, 그게 들어맞는 순간 행복했습니다.
그 시절엔 대학원에서 공부했던 CAPM(자본자산가격결정 모형)이니, 포트폴리오 이론을 이야기하면 다들 웃었습니다. 마코위츠니 샤프니 하는 사람은 교과서에나 나오지,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기본적 분석’(Fundamental Analysis)의 틀도 엉성했고 기업 가치 평가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원서를 구해와 공부하고 시장에 적용해, 실제 주가 예측에 유용하게 사용되면 크게 주목받던 시절이었지요. 지금은 초보 투자자들도 다 아는 PER(Price Earnings Ratio·주가 수익 비율)을 잣대로 자본 시장 개방과 함께 외국인 투자자들이 주식을 사들이면서, 소위 ‘저PER 혁명’(PER이 낮은 기업에 매수세가 몰려 주가가 몇 배에서 몇십 배 급등한 현상)이 일어난 시절이었으니 말입니다. 주식 투자의 기본인 ‘기본적 분석’이 이 정도였으니, ‘기술적 분석’(Technical Analysis)은 완전히 초보 단계였습니다. 일본에서 이론서를 가져와 베끼는 수준이었지요. 실제 주식 시장에서의 적용도 주먹구구였지요. 그러던 차에 저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습니다. 1995년, 사내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미국으로의 연수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한국에 선물(先物)시장 개장을 앞두고 글로벌 선물 시장의 중심지인 미국 시카고에 선물연수를 가게 된 거지요. 주식 투자 분석의 양 축 중의 하나인 기술적분석을 마스터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술적 분석의 관점에서 당시 한국 주식 시장은 황무지였던 반면 시카고는 이론과 실무 모두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었습니다.
제 시카고 연수 중 절반은 연수가 아닌 실제 자산 운용이었습니다. 오전에는 우리회사가 위탁한 자금 100억원 중 절반인 50억원을 실제 선물 시장에서 운용했습니다. 기본적 분석이 무용지물인 선물 시장에서 저는 더욱 기술적 분석을 깊게 파고들었습니다(선물 투자에서는 기업가치를 분석하는 기본적 분석보다는 시장분석 및 가격분석에 중점을 두는 기술적 분석이 더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오후엔 CME(Chicago Mercantile Exchange·시카고 상업 거래소) 도서관에 가서 책과 논문을 뒤지고, CBOT(Chicago Board of Trade·시카고 상품 거래소)에서 열리는 강좌를 제 개인 돈으로 수강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대학시절 해적판 원서로만 공부하던 저에게 미국 전문 서적은 너무 비쌌습니다. 당시 햄버거 세트 메뉴가 2~3달러였었는데, 책은 한 권에 20~30달러를 했지요. 책 한권이 열흘 치 점심값인 셈입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회사에서 몰래 통째로 복사하는 못된 짓도 하고, 지금은 없어진 어느 대형서점에서 책 두 권을 구매하면 한 권은 사고, 한 권은 복사한 후 다시 가서 환불하는 짓을 여러 번 했지요. 아마도 서점 직원은 제가 그러는 걸 분명히 알았을 겁니다. 그래도 돈 없는 불쌍한 동양인 연수생을 너그러이 봐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모은 책이 100권 가까이 됐습니다.
그런데 책만 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어요. 당시 시카고에는 펀드 매니저나 애널리스트를 대상으로 CME나 CBOT에서 열리는 강좌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기술적분석의 구루(Guru·대가)들이 직강하는 강좌라 수강료가 매우 비쌌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한 달 동안 강의하는데 무려 250달러였어요. 그런 강좌를 3개 정도 들으니 다른 연수생들처럼 골프를 치고, 여행 갈 시간도 돈도 없었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저는 기술적 분석의 스승을 운명같이 만났습니다. 저에게 큰 가르침을 준 설리번(Gean O’Sullivan)은 예순이 다 된 백발의 시니어였습니다. 그는 시카고 선물 시장에서 ‘테크니컬의 구루’로 통하는 테크니컬 애널리스트였습니다.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리포트를 잘 쓰지 않았지만, 중요한 이벤트나 모멘텀이 발생하면 어김없이 시장에 대해 코멘트했지요. 그가 코멘트하는 날의 리서치센터 모닝 미팅엔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심지어 그가 아침에 발표한 ‘숏 노트(Short Note)’는 오전 중 언론사를 통해 시카고를 넘어 뉴욕, 런던 등 전 세계로 뿌려졌습니다.
그런 최고의 스페셜리스트를 보며 나도 저런 길을 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마흔살 만 되면 애널리스트들에게 조기 은퇴를 강요하는 당시의 한국 주식시장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실력과 경륜을 인정해 주는 미국의 풍토가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정했습니다. 한국 주식시장에 기술적 분석을 알리고, 적어도 한국에서 기술적 분석의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했지요.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길은 다양합니다. 저는 운 좋게도 적절한 타이밍에 기술적 분석에 관심을 가지며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차티스트(기술적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테크니컬 애널리스트를 부르는 별칭)라는 분야를 파고들었습니다만, 커리어가 꼭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지요. 운명처럼 기회가 오기도 하고, 어릴 때부터의 꿈꾸던 일로 스페셜리스트가 되기도 합니다. 한 분야를 깊고도 깊게 파고들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세계가 열립니다. 거기서 희열과 전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게 스페셜리스트의 매력입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이윤학 전 BNK 자산운용 대표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입상을 한 겁니다. 우체국 전신환으로 상금을 받았는데, 너무 기뻤습니다. 상금도 상금이지만 ‘누군가 내 글을 읽고 가치를 알아주는구나’란 생각에 마음이 붕 떴지요. 이게 제 인생에서 애널리스트로서의 출발점인 것 같습니다. 내가 분석하고 주장한 것을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는 것, 그 자체에 매력을 느꼈는데 애널리스트가 하는 업무가 바로 그런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증권 회사에 입사하기로 마음을 먹었지요.
제가 입사한 시절은 우리나라 주식 시장의 10년간 대활황이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코스피가 100포인트에서 1000포인트까지 무려 10배가 올라, 투자자는 물론 증권사 직원까지 흥분해 있던 시기였습니다. 주가가 조금 하락해도 미래를 믿고 투자하던, 소위 ‘땅 팔고 집 팔아서’ 주식 투자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신입 사원들의 1순위 지원은 당연히 본사 근무가 아니라 지점 영업이었습니다. 그래야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저도 첫 1년을 지점에서 근무했습니다. 하지만 애널리스트의 꿈은 변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욱 굳어졌지요. 저는 당시 투전판 같던 지점 영업이 싫었습니다. 제대로 공부하고 제대로 투자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1년 만에 본사 근무를 지원하자, 다들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거지요. 그래도 좋았습니다. 공부하고 그 내용을 시장에 적용해 보고, 그게 들어맞는 순간 행복했습니다.
그 시절엔 대학원에서 공부했던 CAPM(자본자산가격결정 모형)이니, 포트폴리오 이론을 이야기하면 다들 웃었습니다. 마코위츠니 샤프니 하는 사람은 교과서에나 나오지,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기본적 분석’(Fundamental Analysis)의 틀도 엉성했고 기업 가치 평가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원서를 구해와 공부하고 시장에 적용해, 실제 주가 예측에 유용하게 사용되면 크게 주목받던 시절이었지요. 지금은 초보 투자자들도 다 아는 PER(Price Earnings Ratio·주가 수익 비율)을 잣대로 자본 시장 개방과 함께 외국인 투자자들이 주식을 사들이면서, 소위 ‘저PER 혁명’(PER이 낮은 기업에 매수세가 몰려 주가가 몇 배에서 몇십 배 급등한 현상)이 일어난 시절이었으니 말입니다. 주식 투자의 기본인 ‘기본적 분석’이 이 정도였으니, ‘기술적 분석’(Technical Analysis)은 완전히 초보 단계였습니다. 일본에서 이론서를 가져와 베끼는 수준이었지요. 실제 주식 시장에서의 적용도 주먹구구였지요. 그러던 차에 저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습니다. 1995년, 사내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미국으로의 연수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한국에 선물(先物)시장 개장을 앞두고 글로벌 선물 시장의 중심지인 미국 시카고에 선물연수를 가게 된 거지요. 주식 투자 분석의 양 축 중의 하나인 기술적분석을 마스터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술적 분석의 관점에서 당시 한국 주식 시장은 황무지였던 반면 시카고는 이론과 실무 모두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었습니다.
제 시카고 연수 중 절반은 연수가 아닌 실제 자산 운용이었습니다. 오전에는 우리회사가 위탁한 자금 100억원 중 절반인 50억원을 실제 선물 시장에서 운용했습니다. 기본적 분석이 무용지물인 선물 시장에서 저는 더욱 기술적 분석을 깊게 파고들었습니다(선물 투자에서는 기업가치를 분석하는 기본적 분석보다는 시장분석 및 가격분석에 중점을 두는 기술적 분석이 더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오후엔 CME(Chicago Mercantile Exchange·시카고 상업 거래소) 도서관에 가서 책과 논문을 뒤지고, CBOT(Chicago Board of Trade·시카고 상품 거래소)에서 열리는 강좌를 제 개인 돈으로 수강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대학시절 해적판 원서로만 공부하던 저에게 미국 전문 서적은 너무 비쌌습니다. 당시 햄버거 세트 메뉴가 2~3달러였었는데, 책은 한 권에 20~30달러를 했지요. 책 한권이 열흘 치 점심값인 셈입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회사에서 몰래 통째로 복사하는 못된 짓도 하고, 지금은 없어진 어느 대형서점에서 책 두 권을 구매하면 한 권은 사고, 한 권은 복사한 후 다시 가서 환불하는 짓을 여러 번 했지요. 아마도 서점 직원은 제가 그러는 걸 분명히 알았을 겁니다. 그래도 돈 없는 불쌍한 동양인 연수생을 너그러이 봐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모은 책이 100권 가까이 됐습니다.
그런데 책만 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어요. 당시 시카고에는 펀드 매니저나 애널리스트를 대상으로 CME나 CBOT에서 열리는 강좌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기술적분석의 구루(Guru·대가)들이 직강하는 강좌라 수강료가 매우 비쌌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한 달 동안 강의하는데 무려 250달러였어요. 그런 강좌를 3개 정도 들으니 다른 연수생들처럼 골프를 치고, 여행 갈 시간도 돈도 없었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저는 기술적 분석의 스승을 운명같이 만났습니다. 저에게 큰 가르침을 준 설리번(Gean O’Sullivan)은 예순이 다 된 백발의 시니어였습니다. 그는 시카고 선물 시장에서 ‘테크니컬의 구루’로 통하는 테크니컬 애널리스트였습니다.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리포트를 잘 쓰지 않았지만, 중요한 이벤트나 모멘텀이 발생하면 어김없이 시장에 대해 코멘트했지요. 그가 코멘트하는 날의 리서치센터 모닝 미팅엔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심지어 그가 아침에 발표한 ‘숏 노트(Short Note)’는 오전 중 언론사를 통해 시카고를 넘어 뉴욕, 런던 등 전 세계로 뿌려졌습니다.
그런 최고의 스페셜리스트를 보며 나도 저런 길을 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마흔살 만 되면 애널리스트들에게 조기 은퇴를 강요하는 당시의 한국 주식시장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실력과 경륜을 인정해 주는 미국의 풍토가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정했습니다. 한국 주식시장에 기술적 분석을 알리고, 적어도 한국에서 기술적 분석의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했지요.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길은 다양합니다. 저는 운 좋게도 적절한 타이밍에 기술적 분석에 관심을 가지며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차티스트(기술적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테크니컬 애널리스트를 부르는 별칭)라는 분야를 파고들었습니다만, 커리어가 꼭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지요. 운명처럼 기회가 오기도 하고, 어릴 때부터의 꿈꾸던 일로 스페셜리스트가 되기도 합니다. 한 분야를 깊고도 깊게 파고들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세계가 열립니다. 거기서 희열과 전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게 스페셜리스트의 매력입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이윤학 전 BNK 자산운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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