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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훈
홍기훈
The Money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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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약력
CFA한국협회 금융지성위원회 위원
홍익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홍익대학교 메타버스금융랩 소장

*소개글
다양한 현안들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경제/금융 개념들과 지식들을 쉽게 풀어 설명하려 합니다. 제 컬럼을 통해 독자들이 금융에 조금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사상 최대의 공산주의 실험 '대약진 운동'

    중국의 대약진운동은 시작부터 많은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 정부의 행정력이 경제계획을 아우를 만큼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큰 그림을 그려야 할 정부가 제 기능을 못 하자 중국엔 빈부·도농 격차 등 최악의 경제 불균형이 찾아왔습니다.대약진운동의 실패 원인은 폭력에 기반한 농업 집단화를 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일하는 사람과 일하지 않는 사람은 평등하다'라는 왜곡된 평등주의가 인민공사화운동을 통해 퍼져나가 산업 생산성이 급격하게 떨어지기도 했습니다.또 중공업과 대규모 인프라 건설에 지나치게 많은 인력이 투입돼 식량 생산량이 크게 줄었습니다. 토법고로(土法高爐)도 경제에 악영향을 줬습니다. 토법고로는 전통적인 기술로 만든 용광로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중국 정부는 인민공사 뒤뜰마다 토법고로를 설치해 인민들이 직접 강철을 생산하도록 지시했습니다.용광로를 지필 땔감을 구하려다 곡물 수확시기를 놓쳐 수확량이 감소했습니다. 또 많은 숲이 황폐해져 오히려 농사를 망치게 됐습니다. 냄비, 자전거, 프라이팬 등을 모아 용광로에 넣은 결과 토법고로에서 생산되는 철은 순수하지 못하고 품질이 낮았다는 문제도 있었습니다.이전 칼럼에서 설명했듯이 1958년에는 제사해운동(除四害運動)으로 참새 잡이 광풍이 불어 참새 개체수가 급감했고, 해충이 창궐했습니다. 먹이사슬이 무너진 결과 중국에는 대규모 흉년이 불어닥쳤습니다. 1960년에는 대규모 가뭄과 태풍 그리고 홍수가 발생해 중국 농토의 절반 정도가 피해를 봤습니다.1960년 4월, 이 와중에 중국 정부는 소련으로부터 간섭받지 않겠다고 선언해 양국의 관계가 악화했습니

    2024-03-21 10:00
  • 中 마오쩌뚱 "참새는 해로워"…'4200만명 아사' 비극의 시작

    제사해운동(除四害運動)은 중국의 대약진운동 기간 실행된 중요한 정책 중 하나였습니다. 어느 날 마오쩌둥은 참새가 인민이 먹을 소중한 곡식을 먹는 것을 보고 '저 새는 해로운 새'라고 지적했습니다. 며칠 후 '전국농업발전강요'라는 총 40개의 정강이 포고되는데 여기의 27번째 항에 '제사해'가 포함됐습니다. 제사해는 말 그대로 참새, 모기, 파리, 들쥐 등 네 가지 해로운 동물을 제거하는 운동입니다.아울러 중국사회과학원은 이 네 가지 동물이 인민에게 미치는 위험성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특히 마오쩌둥이 직접 지적한 참새는 매우 위험한 동물로 분류됐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전 인민이 참새를 잡는데 동원됐습니다.많은 사람이 북이나 세숫대야를 시끄럽게 쳐 참새들이 내려앉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참새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이 행위를 계속했습니다. 제사해운동이 실시된 첫날 베이징 시민 300만명이 동원돼 약 8만마리의 참새를 사냥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공산당은 인민들에게 참새 사냥을 할당했고 포상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1년 뒤에는 약 2억마리의 참새가 포획됐습니다. 참새 사냥은 성공적이었고, 공산당은 곡식을 먹는 참새가 사라졌으니 풍년이 올 것으로 기대했습니다.그러나 당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1959년 중국에는 흉작이 찾아왔습니다. 1958년 2억t에 달했던 식량 생산량은 1959년에는 1억7000만t으로 줄었습니다. 1960년과 1961년의 수확량도 각각 1억4350만t, 1억4750만t에 불과했습니다. 수확 면적도 급격히 줄었습니다. 1958년 1억2200만ha였던 수확면적은 1959년 1억1600만 ha로 600만ha 줄었습니다. 2022년 한국의 벼 재배면적이 72만7000ha인 것을 감안

    2024-02-20 06:36
  • 1950년대 중국 대약진운동은 왜 실패했나

    1953년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한 후 중국과 소련은 공산주의 이념을 놓고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경분쟁까지 불거지며 양국 관계는 심각하게 악화했고, 중국은 더 이상 소련의 경제원조를 기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중국은 내수 시장과 자국 생산을 바탕으로 경제발전을 이뤄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던 것입니다.소련식 경제모델에도 더 이상 기댈 수 없게 됐습니다. 소련식 경제모델은 공업 발전에 필요한 자본을 농촌과 농민 계층으로부터 조달합니다. 그런데 1958년 중국의 농촌 경제는 사실상 붕괴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대약진운동은 농공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면서 더 빠르게, 더 좋게, 더 싸게 발전한다는 목표를 갖게 됐습니다.1958년 1월 28일 최고국무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모든 혁명 과정은 공산주의가 실현될 때까지 사회적 모순과 투쟁의 연속으로 이뤄집니다. 기존의 현실을 혁명적으로 타파해야지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연속혁명론을 언급했습니다. 아울러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엔 혁명적인 대약진운동이 필요함을 강조했습니다. 이 연설은 이후 대약진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됩니다.같은 해 5월 중국공산당 제8회 전국대회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총 노선'을 채택하며 대약진 운동은 시작됐습니다. 소련식 공업화가 야기한 사회·경제적 문제 해결, 부강한 사회주의 국가 건립을 기치로 내세웠습니다.대약진운동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농업 집단화'였습니다. 이를 위해 대규모 집단농장인 인민공사(人民公社)를 설치하고, 농촌의 행정 조직과 경제 조직을 합쳤습니다. 인민공사는 적게는 1만명부터 많게는 4만명까지 포용할

    2024-01-19 11:26
  • 중국 대약진운동은 어떻게 시작됐나

    제1차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이 끝나갈 무렵 중국 경제는 어느 정도 안정된 흐름을 보였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산업과 농업 성장 간의 불균형, 비효율성에 대한 인민들의 불만, 경제정책 결정 과정의 유연성 부족 등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인지했습니다.이러한 문제들은 중앙 집중화된 산업 중심의 소련식 공산주의가 중국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산업화 초기 중공업 중심의 발전 전략을 채택한 소련에 비해 1956년 당시 중국의 산업구조는 훨씬 낙후됐기 때문입니다.산업 구조도 문제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 구조에 있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따르면 사회주의 혁명은 도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그러나 중국은 달랐습니다.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도시와 노동자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 농촌과 농민을 중심으로 진행됐습니다. 이는 중국 공산당이 중일전쟁 시기부터 국민당과의 전쟁을 대비한 점에서 기인합니다. 공산당은 생활 환경이 열악했던 농민들의 적개심을 이용해 농촌을 중심으로 공산주의가 스며들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중국식 사회주의 모델인 '마오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달리 농촌을 혁명 근거지로 삼아 발전했습니다. 중일전쟁, 국공내전을 거치며 중국의 산업 기반이 붕괴했고, 농업은 자연스럽게 초기 중국 산업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중국은 소련식 경제정책을 도입하며 농업과 공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먼저 제1차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통해 농업을 효율화했습니다. 농업에 종사했던 인력을 중공업과 제조업에

    2023-12-14 07:10
  • 농업 효율화한 중국의 '제1차 5개년 경제계획'

    '제1차 5개년 계획(1953~1957)' 당시 중국의 농업도 조직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1953년 가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곡물 및 기타 원자재의 구매와 유통을 독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정책은 부농과 곡물 상인 사이의 관계를 끊어버려서, 곡물에 대한 투기로 이익을 얻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중국 정부는 곡물 생산량은 늘리고, 농업에 투입되는 인력과 자원을 줄이고 싶었습니다. 따라서 농업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는데요. 농업에 자원을 원활하게 투입하고, 정부가 농산물에 직접 관여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농민들을 집단 단위로 묶어 관리하려고 한 겁니다. 농민의 집단화 과정은 1955년부터 1958년까지 계속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존 5~7개 가구로 이뤄졌던 작은 규모의 집단은 마을 단위의 농업 생산자 협동조합으로 변모했습니다. 마을 단위의 농업협동조합에 소속된 가구는 자신들이 생산에 기여한 곡물 수확량의 일부를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마을 단위의 협동조합이 자리를 잡자, 이 협동조합들은 상위 구조의 고급 협동조합으로 발전했습니다. 고급 협동조합에 속한 가구의 소득은 전적으로 그 가구가 기여한 노동량에 달려있었습니다. 즉 공동생산·공동소비 체계가 구축된 것이다. 나아가 중국 정부는 채소, 과일 및 가축을 기르는 작은 사유 토지를 보유를 허락했습니다. 중국 농업산업의 집단화 과정은 천천히 시작됐습니다. 그러다가 1957년에 이르러서는 전체 농가의 약 93.5%가 고급 생산자 협동조합에 가입할 정도가 된 겁니다. 농업이 집단화하며 규모의 경제 효과로 농업의 효율성이 높아졌고, 농업에 투입되는 노동력이 줄었습니다. 이는 산업 노동자 수의 증가로 이

    2023-11-11 07:14
  • 사회주의 기초 다진 중국의 '제1차 5개년 경제계획'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후 과도기 정부 행정위원회가 만들어졌다. 행정위원회 산하엔 재정경제위원회가 있었다. 이 조직은 국가 경제를 계획하고 건설 관리를 담당했다. 천윈과 보이보의 주도 아래 재정경제위원회는 중국의 사회주의 경제체제 구축에 핵심적이고 독점적인 역할을 했다. 이 위원회의 우선 목표는 국가 경제 질서 복원, 가격 안정, 화폐 안정, 계획된 경제의 관리 메커니즘 설정, 그리고 '제1차 5개년 계획' 준비였다. 1953년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 주요 혁명 세력의 지휘 아래 중국은 경제적 기반을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구축할 준비가 된 것이다. 중국 정부는 사회주의 경제구축과 성장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소련의 경제 모델을 채택했다. 앞서 소련은 기업의 국영화, 대규모 집단 농업 그리고 중앙집중식 경제 계획을 채택했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방침은 '제1차 5개년 계획(1953- 1957)'에 반영됐다. 소련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제1차 5개년 계획은 중공업과 자본 집약적·기술 기반 공업을 발전시켜 경제성장률을 높이려 했다. 소련 정부 당국자들은 중국 관료들이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하는 데 도움을 줬다. 대규모의 소련 엔지니어, 기술자, 과학자는 중국에서 새로운 중공업 시설을 개발하고 설치하는 데 일조했으며 중국은 소련에서 공장설비, 중장비를 수입했다. 처음부터 소련과 중국 공산당이 친밀했던 것은 아니다.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5년 소련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중소우호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소련은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에 협조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군을 몰아내고 만주로 진군한 소련군은 도합 50억달러에 달하는 공업시설

    2023-10-28 07:21
  • 국공내전 후 폐허된 중국…강력한 통제로 경제 회복

    1949년 중국 공산당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본토의 기반이 모두 파괴돼 경제가 사실상 마비됐습니다.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화폐 가치는 바닥을 쳤고, 시장경제는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중국 정부는 인플레이션 통제, 통화 시스템 재건을 최우선 경제과제로 삼았습니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통화 체계를 통일하고, 신용을 강화했습니다. 아울러 지방 정부의 예산을 제한하여 중앙 정부의 통제하에 두면서 화폐의 가치를 보장하려고 노력했습니다. 3년에 걸친 노력으로 중국 공산당은 초고속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중국 본토를 장악한 새로운 정부의 정통성에 일조했습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시기를 제외하면 마오쩌둥의 통치 기간 중국은 위안화의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했습니다. 물가를 잡은 중국은 국영 무역 기관을 설립해 규제를 시작했습니다. 이 기관들은 다른 사기업들과 경쟁하며 영향력을 확보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기관을 시장 재구성·재통합을 위해 활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돈의 가치가 안정화하는 흐름을 보였습니다. 무역과 상업을 통제하는 동시에 중국 정부는 중앙은행을 만들어 중앙 집중화된 은행 체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중국은 1948년 12월1일 허베이은행(华北银行), 베이하이은행(北海银行), 시베이농민은행(西北农民银行) 등 세 은행을 합병해 중국인민은행을 발족했습니다. 기존에는 이 세 은행이 각자 화폐를 발행하고 유통했는데, 이를 통합한 것입니다. 이후 1950년 마오쩌둥은 모든 은행을 국유화했습니다. 중국인민은행은 결제 청산, 및 창구 서비스 등 실질적인

    2023-10-14 08:46
  • 중국 공산당, 국공내전서 승리한 비결은?

    경제개혁 이전 중국 경제 발전과정을 총 다섯 기간으로 나눠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8월부터 1949년까지의 중국 경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의 기본적인 목표는 중국을 현대적이고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로 전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표는 1924년 1차 국공합작이 이뤄졌던 때부터 정해져 있던 목표였습니다. 또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이후에도 유지됐습니다. 경제 관점에서 이 목표를 분석해보면 산업화, 생활 수준의 향상, 소득 격차의 축소, 현대 군사 장비의 생산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도시와 농촌 경제는 크게 달랐습니다. 국공내전, 마오쩌둥 집권 시기를 거치며 중국의 농촌 경제는 대체로 비화폐화되고 비상품화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즉, 도시 주민과 달리 농촌의 중국인들은 돈과 산업용품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공산당은 화폐 거래로 인한 사회적 변화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국공내전 기간 중국 공산당은 토지개혁을 실시했습니다. 토지개혁은 지역별로 다른 시기에 불균등하게 진행됐습니다. 중국 북부지역의 토지개혁 운동은 일본과 협력한 배신자에게 복수하는 데 농민들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반대로 당시 일본 점령군과 국민당 정부는 대지주의 이익을 지켜주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때문에 국공내전 기간 펼쳐진 토지개혁 운동은 대지주에 대한 폭력적인 투쟁의 경향을 띠게 됐습니다. 이는 농민 계층의 국민당에 대한 정치적 투쟁과 궤를 같이했습니다. 토지개혁은 공산당의 승리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농민들이 대지주에게 토지를 뺏을수록 국민당의 입지는 줄어들고, 국민당

    2023-09-29 09:00
  • "中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 경제 혼란 가중"

    1979년 이전 중국은 마오쩌둥 주석의 지도 아래 계획경제를 유지했습니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개별 가정 농장을 묶어 공동생활체를 조직했습니다. 이 조치로 1950년대 중국은 공산주의적 경제기반을 성공적으로 다졌습니다. 산업화 속도를 높이기 위해 중국 정부는 1960년대와 1970년대 물적·인적 자본에 대규모로 투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1978년 중국 국영기업은 전체 산업 생산량의 약 75%를 차지했습니다. 국영기업이 산업 생산량의 대부분을 점유한다는 것은 중앙의 계획에 따르는 경제체제가 구축된 것을 의미했습니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민간·외국 기업의 투자는 금지됐습니다. 당시 중국 정부의 주요 목표는 '자급자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외국과의 무역은 중국 안에서 만들 수 없거나 얻을 수 없는 물품을 얻는 것으로 제한됐습니다. 이러한 폐쇄적인 정책들은 경제적 비효율을 초래했습니다. 경제의 대부분이 중앙 정부에 의해 관리·운영됐기 때문에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시스템이 없었습니다. 또 기업, 노동자, 농민이 생산량과 품질을 높여도 인센티브가 거의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경제활동은 대부분 정부가 설정한 생산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만 집중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1953년부터 1978년까지 중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연평균 6.7% 성장했다고 주장합니다. 다수의 전문가는 데이터의 정확성에 의문을 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해당 기간 중국의 공무원이 다양한 정치적 이유로 생산량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은 영토가 넓고, 사람이 많은데다 사회가 극단적으로 닫혀있다 보니 1950~1970년대의 데이터를 검증하는 것은

    2023-09-15 07:21
  • "중국 경제 성장률, 개혁 정책 성패에 달렸다"

    1979년부터 시작된 경제 개혁을 통해 지난 50년동안 중국은 놀라운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 기간 중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연평균 약 10% 성장했습니다. 중국은 '역사상 가장 빠르게 지속적으로 성장한 주요 경제 체제'로 세계은행에 기록됐습니다. 구매력평가지수(PPP)를 기준으로 봤을 때,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경제체가 됐습니다. 아울러 부가 가치 제조업, 상품 무역, 외환 보유액 등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경제적 발전을 이해하려면 중국의 대내외 경제 정책과 발전 전략의 현 위치를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한 점은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에게 우려로 다가왔습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중국이 과소평가된 화폐와 국내 기업에 대한 보조금 등 불공정한 무역 전략을 활용해 저렴한 상품으로 미국 시장을 홍수처럼 채운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전략이 미국의 일자리와 임금, 생활 수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중국이 산업 정책을 통해 국내 산업과 기업을 특별히 후원하고 보호하며 중국에서 발생하는 지적 재산권 침해와 도난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미국 내 지식기반 산업의 경쟁력을 저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이 미국의 주요 수출 시장 중 하나로 자리 잡긴했지만, 미국 기업이 중국 시장에 진출할 때 장벽이 존재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런 장벽 때문에 미국 기업은 중국에서의 사업 기회를 제한 받거나, 중국 내에서 생산 시설을 설립하도록 강요받을 수 있다는 비판과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중국은 경제 발전을 주요 정책 중 하나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중국 정부

    2023-09-02 08:20
  • 예견된 중국 경제 둔화…미래 내다보려면

    50년 전 중국은 중앙 집중적으로 통제된 경제 체계를 갖췄습니다. 국제적으로 고립돼있었고, 비효율적이며 빈곤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1979년 무역·투자를 개방하고, 시장 경제로 전환하며 가파르게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2018년까지 중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연평균 9.5%에 달했습니다. GDP가 약 8년마다 두 배로 불어났으며, 8억명가량의 인구가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러한 변화로, 중국은 세계의 2대 경제 대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국가와 무역국가의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개방 이후 중국은 미국의 주요 상품 거래 파트너이자 주요 수입국, 그리고 주요 수출 시장으로 부상했습니다. 중국은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통해 미국 연방 부채의 주요 외국 보유국이 돼 미국의 이자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중국의 경제성장은 둔화하고 있습니다. 다만 중국의 빠른 경제 성장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징후가 수년 전부터 관측됐기 때문입니다. 2007년 14.2%에 달했던 중국의 GDP 성장률은 2018년 6.6%로 감소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내년 중국의 성장률이 5.5%까지 떨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2021년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의 반동으로 8.1%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작년 경제성장률은 3%로 시장 기대치를 밑돌았습니다.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6% 아래로 떨어진 후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은 힘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중국 정부는 성장 둔화를 '뉴노멀(새로운 표준)'이라는 표현으로 받아들이며, 성장 전략을 바꾸고 있습니다. 중국은 이제 수출과 고정 투자에

    2023-08-21 08:42
  • 1992년 영국 금융시장 덮친 '검은 수요일'

    1992년 9월 16일은 '검은 수요일'이라고 불립니다. 앞서 영국은 존 메이저 총리의 지휘 아래 유럽환율메커니즘(ERM)에 가입했고, 국민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습니다. 영국이 유럽경제에 편입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당시 1파운드는 2.95 서독 마르크로 교환비율이 고정됐습니다. 목표비율과 6% 이상 교환비율이 차이가 나게 되면 당국이 개입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만약 파운드화가 2.773마르크 이하의 가치로 거래된다면 영국 중앙은행과 영국 정부는 외환시장에 개입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1992년 9월 조지 소로스는 이 교환비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판단의 배경에는 독일의 통일이 있습니다. 1990년 10월 3일, 동독이 해체되고 독일의 통일이 선언됐습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세계 평화에는 이바지했지만 하나의 유럽경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있어 걸림돌이 됩니다. 통일 독일은 상대적으로 낙후됐던 동독지역을 개발하려 천문학적인 투자를 결정했습니다. 이를 위해 막대한 양의 마르크화가 발행되었습니다. 지나친 화폐 발행은 필연적으로 인플레이션을 가져옵니다. 독일연방은행인 분데스방크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2년 동안 10차례에 걸쳐 금리를 인상합니다. 자연스럽게 금리가 높은 독일로 전 세계의 투자금이 몰렸고, 마르크화의 가치는 폭등합니다. 반대로 유럽의 국가들은 투자부족과 화폐가치 하락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독일의 금리인상에 발맞춰 자국의 금리를 높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금리인상은 경기침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파운드화의 가치하락과 금리인상으로 인한 경기침체 사이에서 큰 고민을 하게

    2023-06-30 09:14
  • 유로존 도입의 신호탄 '유럽통화제도'

    지난 칼럼에서는 지폐에 자국 위인의 초상을 포함하는 이유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이번에는 유럽환율조정체제에 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필자가 박사학위를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공부하기로 한 배경엔 유럽을 여행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영국에서 유학하며 유럽을 여행할 때 겪는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화폐였습니다. 유럽대륙의 국가들은 유로화를 사용하는 데, 영국은 파운드화를 사용했기에 유럽 대륙으로 여행할 때 마다 매번 화폐를 바꿔야 해 불편했습니다. 유럽은 오랫동안 단일통화 구축에 힘썼습니다. 1970년 '베르너 보고서'를 시작으로 1979년 3월 유럽통화제도(European Monetary System, EMS)를 출범했습니다. 1979년 체결된 유럽통화제도의 일환으로 유럽환율조정체제가 도입됩니다. 이 유럽환율조정체제는 유럽 국가 화폐 간의 환율변동을 조정해서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이 체제는 유럽연합의 통화동맹이나 단일 통화 도입의 신호탄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어 1986년 단일유럽의정서(Single European Act)를 체결하고,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서명하며 유로가 본격적으로 도입됐습니다. 2023년 5월 현재, 유로존 소속 20개국과 통화협정이 체결된 미소 국가 4개국(모나코·바티칸·산마리노·안도라)을 포함 총 26개국, 약 3억5000만여명의 사람이 유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영국은 파운드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당초 영국은 유럽의 단일통화 구축과정에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서독의 낮은 인플레이션과 눈부신 경제성장을 목도한 영국은 서독의 통화정책과 보조를 맞췄고, 1990년 존 메이저의 지휘아래 유럽환율조정체제에 가입합

    2023-05-24 07:20
  • 영국 파운드화에 초상화가 들어간 이유

    1960년 3월 17일, 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그려진 첫 지폐(1파운드 지폐)를 발행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지폐에 지도를 제외하면 그림을 넣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영란은행은 여왕의 초상화를 지폐에 인쇄하는 것은 국가의 안정성과 연속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국가의 자부심·정체성을 나타냄과 동시에 왕가의 문화·역사적 중요성을 부각시킨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후 영란은행은 10실링 지폐(1961년), 5파운드 지폐(1963년), 10파운드 지폐(1964년), 20파운드 지폐(1970년), 50파운드 지폐(1981년) 등에 엘리자베스 2세의 사진을 넣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지폐에 반영됐습니다. 이 지폐들을 모아서 엘리자베스 2세 초상의 변화를 보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영국에 이어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도 엘리자베스 2세의 초상을 자신들의 지폐에 삽입했습니다. 결국 엘리자베스 2세의 초상은 10개국 30여개의 지폐에 삽입됐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가의 지폐에 초상을 실은 사람이 됐습니다. 이후 많은 나라들이 국가 자부심 제고 등의 이유로 자국 위인들의 얼굴을 지폐에 포함하게 됩니다. 위인의 초상을 화폐에 넣으면 위조를 방지할 수도 있습니다. 인물의 초상화는 복잡하고 세밀해 정확하게 복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눈은 건물이나 풍경에서 사소한 차이를 잘 인식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얼굴은 평소에도 관찰하는 습관이 있기에 사소한 차이만 생겨도 금방 이를 알아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얼굴의 미묘한 차이를 더 잘 인식하기 때문에 위조지폐를 식별하기가 더

    2023-04-27 07:00
  • 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한 까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1939년까지를 전간기라고 부릅니다. 전쟁과 전쟁 사이의 기간이라는 의미입니다. 제1차대전 후 맺어진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 원수가 '항구적 평화가 아닌 길어봐야 20년 정도의 휴전'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전간기의 유럽 정치와 외교는 매우 불안했습니다.이 기간 유럽과 미국은 엄청난 변화를 겪습니다.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된 미국은 유례없는 경제적 황금기를 누리게 됩니다. 유럽은 1차대전의 피해를 복구하지 못하고 허덕였습니다. 이후 미국이 대공황에 빠지자 그렇지 않아도 힘들던 유럽의 경제는 더 악화했습니다. 전간기 영란은행, 정치적 판단에서 금본위제 복귀 결정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19년 4월에 이르러서야 파운드화 가치를 방어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금본위제에서 이탈합니다. 타 국가에 비해선 다소 늦은 행보였습니다. 다만 영란은행은 다른 중앙은행과는 달리 전쟁이 끝나면 다시 금본위제로 복귀할 계획이었습니다.전쟁이 끝나자 영란은행은 계획대로 1925년 4월 28일 당시 재무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의 주도하에 금본위법을 발표하고 금본위제로 복귀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결정이 경제적인 관점에서가 아닌 정치적인 관점에서 이뤄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 내부에서는 다시 파운드의 가치를 금에 묶어서 기축통화의 지위를 회복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이미 많은 금이 미국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파운드의 가치를 금에 고정하면 파운드는 오히려 금이 아니라 달러에 종속될 것이라고 지적했습

    2023-03-30 07:20
  • 1차 세계대전 후 몬태규 노먼 시대의 영란은행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영란은행 총재를 맡은 몬태규 노먼 총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918년,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납니다. 이후 영국과 유럽은 세계 역사의 중심에서 점차 물러나게 됩니다. 몬태규 노먼 남작이 영란은행 총재를 역임한 1920년부터 1944년은 세계의 경제 중심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옮겨가던, 영국 입장에서 보면 어려웠던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몬태규 노먼은 1871년 런던의 켄싱턴에서 태어났습니다. 노먼의 집안은 금융업계에서 유명했습니다. 노먼의 외조부는 영국 중앙은행장을 지냈고, 노먼의 아버지인 프레데릭 또한 '머천트뱅크(예금과 대출의 업무를 제외한 나머지 금융업무를 종합적으로 수행하는 상업은행, 이하 상업은행)'의 이사였습니다. 그의 형과 사촌들 또한 당시 영국 상업은행들에서 높은 직위에 있었습니다.노먼은 케임브리지대학의 킹스컬리지에서 수학했고, 1892년 그의 아버지가 파트너로 있던 마틴스 은행(Martins Bank)에 입행했습니다. 1894년에는 그의 외할아버지가 파트너로 있던 Brown, Shipley & Co. 라는 투자은행으로 이직하고, 1900년엔 이 회사의 파트너로 승진했죠. 1915년 노먼은 이 회사에서 은퇴하면서 상업은행 커리어를 마칩니다.1907년, 노먼은 영란은행의 이사로 처음 임명됐고 제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국 정부의 금융 자문을 맡았습니다. 이후 1917년 영란은행의 부총재가 되었고 1920년엔 중앙은행장에 오릅니다. 그는 케인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5년 금본위제로의 복귀를 지지했습니다. 문제는 파운드화와 금의 교환 비율을 제 1차 세계대전 이전과 같게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경제는

    2023-03-03 07:21
  • '전비 조달도 전략'…영란은행이 숨기고 싶던 이야기

    지난 칼럼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금본위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이번에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영란은행이 숨기고 싶어 했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은 전에 유럽이 경험하지 못한 규모였습니다. 불과 50여년전 발발했던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 양측이 동원한 총병력은 200여만명 수준이었는데, 제 1차 세계대전에서는 군인 사망자만 1000만명에 달할 정도로 전쟁의 규모와 이로 인한 자원 소모는 급격히 늘어났습니다.전쟁의 주역인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영국, 프랑스 정부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전쟁이 펼쳐지는 동안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24%에 달하는 1906억 달러가 투입됐습니다. 영국은 자그마치 38년 치 예산을 이 전쟁에 쏟아부었습니다.당시 천문학적인 전비를 조달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세금, 해외차입 그리고 국내 국채를 발행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참전국이 세 가지 방식을 모두 사용했습니다. 다만 주로 사용한 방식엔 차이를 보였습니다. 미국은 세금으로 많은 전비를 조달했습니다. 영국은 전쟁 초기에는 국채발행이, 후기에는 미국으로부터 자금을 차입했습니다. 독일은 국채발행이 가장 중요한 전비 조달 방식이었습니다.이 중 가장 쉬운 방법은 국채를 발행하는 것입니다. 국채를 발행한 정부는 국채를 팔아 자본을 조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그 어느 나라의 국민도 정부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경제력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각 나라의 중앙은행은 국민이 국채를 구입할 수

    2023-02-08 07:23
  •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의 영란은행

    지난 글에서는 벨 에포크 시대의 영란은행에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의 영란은행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18세기 유럽은 57년의 전쟁과 43년의 평화를 경험했을 정도로 지속적인 전쟁을 겪었습니다. 이전에도 설명했지만 18세기 전쟁은 여러 유럽 정부들의 재정을 극단적으로 악화시켰습니다. 전쟁은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경제적으로 잔인했습니다.그런데 19세기 들어 전쟁의 경제성이 변화합니다. 프로이센을 격파한 나폴레옹은 1807년 틸지트 조약을 통해 자신이 지출한 전비를 프로이센이 배상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프로이센은 파산 직전에 이르게 됩니다.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제국은 1871년 프랑크푸르트 조약에서 사실상 프랑스 정부의 경제력을 파탄내며 독일이 지출한 전비에 이자까지 쳐서 받아냈습니다.영국 또한 1차 아편전쟁 후 난징조약을 통해 막대한 배상금과 거대한 중국시장을 확보하였습니다. 2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천진, 북경조약을 통해 훨씬 더 많은 배상금과 구룡반도까지 받아냈습니다. 19세기 전쟁은 승리한다면, 돈이 되었습니다. 승전국의 입장에서 전쟁은 훌륭한 국책사업이었습니다. 물론 동시에 패배한 국가의 원한도 감내해야 했지만 말입니다. 1914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이 전쟁은 이전의 전쟁들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행정력 발전으로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이 늘어났고 산업의 기계화를 통해 무기를 많이 그리고 빠르게 생산할 수 있게 됩니다. 전쟁의 규모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게 되었고 당연히 더 많은 전비를 필요로 하였

    2022-12-28 06:00
  • 벨 에포크 시대의 영국 중앙은행

    지난 칼럼에서는 영국 중앙은행(BOE)의 첫 번째 여성 인력인 자넷 코트니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벨 에포크 시대의 BOE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나폴레옹 전쟁이 종식된 1815년부터 금융시장의 세계화는 역사상 유례없이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그 배경에는 전 세계 금광을 소유했던 로스차일드 상사가 있었습니다. 로스차일드 상사는 금본위제를 이끈 주역이죠. 1819년 영국, 1872년 독일, 1878년 프랑스, 1879년 미국, 1881년 이탈리아, 1897년 러시아 등 각국이 금본위제를 채택하면서 전 세계 주요국들은 자국 통화의 표준단위를 금의 가치에 연동시키게 됩니다. 이로 인해 각국 통화 간 가치비교와 교환이 쉬워져 국가 간 무역이 빠르게 증가했습니다. 또 산업혁명과 철도인프라 건설에 들어가는 대규모 자본을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유가증권 발행을 통해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덕분에 세계 금융 시장은 빠르게 통합되고 팽창할 수 있었죠.이처럼 금융의 성장은 경제적 팽창을 가져왔습니다. 1880년부터 1914년까지 약 30년간 좋은 시절이라는 뜻의 '벨 에포크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겁니다. 이 기간 유럽은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유례없이 긴 평화의 시기를 보냅니다.같은 기간 런던은 세계의 금융 중심지였습니다. 자연스럽게 런던에 있었던 BOE가 금본위제를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되죠. 국제 금본위제에선 물가안정을 위해 각국 중앙은행의 금 보유량에 비례해 화폐 발행량을 조정했는데요. BOE의 경우 1900년 기준 금 1온스당 약 4파운드로, 금을 기준으로 한 화폐의 상대적 가치 비율인 태환 비율을 정했습니다. 미국의 경우 1온스당 약 20달러였습니다.금본위제를 시행하는 국가

    2022-12-06 07:06
  • 공식기록에 남은 英중앙은행 첫 관리직 여성

    지난 칼럼에서는 영국 중앙은행(BOE)의 최종대부자 역할에 대한 논란을 촉발한 1866년 금융위기와 BOE의 대응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BOE의 첫번째 여성 인력인 자넷 코트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자넷 코트니는 1865년 11월 27일 영국 링컨셔의 바톤(Barton)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이름은 자넷 엘리자베스 호가스(Janet Elizabeth Hogarth)입니다. 자넷은 1888년 옥스포드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는데요. 그 시절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거의 대부분 남자들이었습니다.  당시 남자들이 수강하는 수업을 듣기 위해선 따로 신청서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또 당시 학장이었던 벤자민 조윗(Benjamin Jowett)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죠. 허가를 받았어도 강의실에서 남학생들과 떨어져 앉아 수업을 들어야 했습니다.  졸업 후 자넷은 첼튼엄 레이디스 칼리지라는 명문 사립학교의 비정규직 선생님으로 일했습니다. 이후 1892년 노동 관련 정부부처의 사무관으로 이직했고, 2년 뒤인 1894년 BOE로 자리를 옮기면서 BOE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첫 관리직 여성 인력이 됐습니다.  자넷은 157.1파운드의 연봉을 받았다고 합니다. 1894년 당시 1파운드는 올해 기준 약 144.5파운드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자넷의 연봉은 약 2만2700파운드(약 3700만원) 정도였던 것입니다.자넷은 케임브리지에서 역사를&n

    2022-11-11 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