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원의원 간첩사건 수사결과...(1)..공작금 7,800만원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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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년 "가농"회장때 포섭당해 ### ### 북한지령 받고 국회의원 출마 ### ### 반정부활동/농민운동등 북에 보고 ###1. 북한 공작조직에 포섭된 경위가. 북한공작원 성낙영에 의한 유인, 포섭 서경원은 84.1 "가톨릭농민회"회장에 선출된 이후 서독의 천주교단체"미레세올"의 지원금과 "가농"회원들의 회비등으로 가농활동및 농민운동을주도해 왔으나 자금압박을 받게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던중- 85.1초 "국제가톨릭 농촌 청년 연맹"(MIJARC) 정기총회 참가초청을 받고 이 기회에 서독교포및 단체를 방문, 자금지원을 호소하기로 결심하고- 85.2초 서독거주 동향후배로서 평소지면이 있는 최권행(35. 당시 서독 유학생, 현 서울대대학원 불문과)등에게 MIJARC총회 참석후 3월 중순경 서독을 방문하겠다는 서신을 발송하였음. 85.2.20 가농 여성부장 임봉재(47)와 함께 출국, 2.24-3.23간 서아프리카아이보리코스트의 수도 아비쟌에서 개최된 MIJARC 총회에 참석, 총회일정을마친후- 3.23 동행한 임봉재와 벨기에 루벵에서 헤어져 열차를 이용, 서독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여 최권행을 만나- 그로부터 재독 북한공작원 성낙영(33. 당시 마부르크신학대 유학중)과 재독 반한인물 김종출(39. 식품점 경영)등을 소개받았으며 그 이후 성낙영, 김종출등 반한인물의 집을 전전, 체류하면서 성락영의 안내로 관광 도중 자신의 신상, 투쟁경력등을 자세하게 알려주었고- 반한집회인 "베를린 시민회관 교포모임", "동학제" (전봉준 추모축제)등에 참석하여 국내정세, 농민운동의 실상, 국내운동권의 활동상황등을 설명하고 자신이 전개하고 있는 농민운동과 인권투쟁을 계속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호소하였음. 85.4.9 성낙영으로부터 "회장님을 도와줄 사람을 찾았으니 만나러가자"는 유인을 받고 그와 동행하여 뮌헨을 거쳐 자동차편으로 오스트리아짤스부르크 시내에 있는 모 식당에 도착, 북한의 해외담당 간부라고 소개한"40대 정모", "40대 임모", "50대 이모"등을 만나 회합하였음. 서경원은 북한 공작지도원들과 회합한 자리에서 서독여행목적, 가농이념및 활동상황과 "국내운동권 동향및 농촌의 문제점"에 대하여 설명하고- "농민운동을 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회장인 나의 활동비가 12만원 밖에 안된다.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하자- 40대 정모는 "서회장이 농민운동을 하는데 자금이 없어 고생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앞으로 조건없이 지원하겠다"고 약속하고 지원방법을 성낙영을 통해 연락하기로 상호 합의하였음. 이어서 서경원은 북한공작지도원 40대 정모로부터- "우리의 목표는 남조선의 운동역량을 성숙, 확장시켜 통일에 기여하게 하는데 있다. 역량을 비축하고 확산시켜라"- "남조선에서의 운동은 인민들에게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도 성급하게 하다가 지도자가 검거되어 조직이 와해되고 있다. 따라서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안전하게 하라"- "조국통일의 초석이 된다는 결의로 농민운동에 전념하면서 가농을 전국적 연대조직으로 발전시켜 생존권 차원에서 대정부투쟁으로 전환되도록 하라"- "서회장과 농민회의 활동을 지켜보면서 신문에 보도되는 것을 기다리겠다" 는 지령을 받고 " 앞으로 성동지를 통해 연락하겠다.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음. 서경원은 그들과 헤어져 프랑크푸르트에 도착, 성락영으로부터 "짤스부르크에서 만난 정선생이 주는것"이라며 미화 5,000달러(100달러권 50매)을수수하고- 자금요청및 연락을 위해 "자금-위장약, 미화 1,000불-위장약 1알, 북한 공작지도원 정모-정신부"라는 음어를 약정하고- 전화연락은 성락영의 괴팅겐소재 자가전화 49-0551-36091를 사용하고 공작금 송금시에는 한국내 외국인 신부등의 구좌를 이용하기로 했으며- 입북에 대비, 북한여권을 만드는데 필요한 여권용사진 3매를 제공하였음. 또한 귀국직전 성낙영에게 활동자금 지원을 추가로 요구하여 공작금미화 5,000달러(100달러권 50매)을 받아 4.17 입국하였고- 4월중순 전남 함평 자가에서 전화로 성낙영에게 "무사히 귀국하였다"고 안착보고를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