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사라족

주인공은 미대 여대생이다. 이민 간 가족과 떨어져 혼자 서울생활을한다. 그는 닥치는대로 문란한 성적편력을 한다. 학교선배와 친구의 애인,대학교수등과 마구 어울려 놀아난다. 마치"성으로의 도피"만이 유일한 의 방법이듯이 아무런 죄책감도 안느낀다. 마광수교수(41.연세대)의 소설 "즐거운 사라"때문에 드디어 저자는철창신세를 지고있다. 그건 문학의 이름으로 포장된 포르노물이라는게검찰측의 해석이었다. 가뜩이나 세상도 시끄러운데,한편의 소설때문에 찬반쪽으로 나뉘어목청들이 높다. 69년 박승훈의 "년구멍과 뱀과의 대화"와,73년염재만의 "반노"이후 처음 있는 일이어서 사회적 물의가 요란하다. "그 남자와 함께 벌인 정사는 정말 싱겁고 재미가 없었다. 그는 사전에 전희라는 단어가 있다는것도 모르는지,나를 침대위에 눕히자마자 옷도 벗지 않은채,허겁지겁 바지단추를 풀고 그 알량한 물건 하나만을 달랑 꺼내놓았다.""그녀석은 아주 작고 말랑말랑해져 있을때 더 귀엽고 예쁘다. 그럴때 남자의 심벌은 갖고 놀기에 아주 좋은 장난감이 된다."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이 민망할 정도의 대담하고 솔직한 표현이다. 이것을 현직 대학교수가 쓴것이 더욱 모가 나고 사회통념에 거슬렸다고 볼수있다.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길"과 장정일의 "너에게 나를보낸다",하재봉의 "블루스 하우스"등도 아슬아슬한 수위의 작품들이다. 사실 춘원 이광수이후의 소설들은 완강한 도덕주의의 껍질만을 씌워왔다.성에 관한 한 숫제 금단지역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독자는 60년대 출생의 팝문화세대가 태반이다. 사회적 치부와 욕구불만을 섹스의 자유로 분출시킨다.작가도 성의 리얼리티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고 고백했지만,"즐거운 사라"의 모델들은 날로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통속적인 엔터테인먼트(오락물)가 문학은 아니라는 것이 검찰이 주장하고픈 대목이지만,문단에서는 공권력까지 개입시켜 표현자유를 간섭하는건 옳지 않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아무튼 성의 상품화시대를 개탄하지 않을수가 없다. 고야가 그린 마야의 나체는 어찌하여 예술일수 있는가. 아무리 위선의 도덕주의가 밉보일지라도 성을 노리개 삼는것이 작가들의 사명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