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의 뿌리] (17) 럭키금속 장항제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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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넘어가는 길목이었던 1936년 6월 3일.정치군사적으로는 2차대전을 예고하는 짙은 전운이 전세계를 뒤덮고경제적으로는 군비마련을 위한 열강들의 금매입경쟁이 한창이었다.이날 한국비철산업의 효시가 된 장항제련소는 1기공사 준공식을 갖고용광로에 불을 때기 시작했다. 공장정문에 걸린 간판은 조선제련(주)장항제련소. 조선제련은 장항제련소를 직접 건설해 43년까지 운영한 회사로 조선식산은행(산업은행의 전신)계열이었다. 조선제련은 일제의 산금정책을 배경으로 35년 2월 설립됐다. 당시 한반도를 통치하던 조선총독부는 32년부터 10년동안 금생산을 10배늘린다는 산금10개년계획을 발표하고 이를위해 신규광산의 개발과제련소건설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해외로부터의 군수물자 수입을위해서는 결제대금으로 쓰이는 금의 확보가 무엇보다도 시급했기 때문이다. 총독부의 산금정책에 따라 한반도에는 장항제련소외에도 일본노구치재벌계의 흥남제련소(33년),스미토모재벌의 원산제련소(37년),미쓰이재벌의 해주제련소(40년)등이 잇달아 건설됐다. 장항제련소 역시 당시의 다른 중공업시설과 마찬가지로 대륙침략이라는 일제의 군사적 목적달성을 위해 건설된 셈이다. 정치 군사적목적을 배경으로 태어난만큼 다른산업과 충분한 전후방연관효과를 갖지못하고 시국과 국제기류의 변화에 따라 부침을거듭하게된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남한지역 최초의 공장다운 공장이라는점과 대장간수준에 머물던 제련의 개념을 바꾸어놓았다는 점에서 엄청난주목을 받았다. 또 제2차세계대전및 태평양전쟁 발발전까지는 총독부의지원정책에 힘입어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전련설비 소결로 정은설비등을 건설하는 2기공사도 무리없이 마쳤으며 장항제련소에서 나온 이익금으로 조선제련은 36년7월 주주들에게 3%의 배당을 하기도했다. 특히 39년에는 장항제련소에서 부수적으로 생산되는 동을 활용키위해조선제련이 경기도 시흥에 국내최초의 전선공장을 세웠으며 40년7월에는장항제련소내에 연제련설비를 설치하기도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상황은 급변하기시작했다. 자원난과 수송난이 악화됨에 따라 일본정부는 42년 전략물자조달정책을 대외조달에서 대내조달로 바꾸었고 뒤이어 43년5월 조선총독부는금산정비령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광석공급의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조업이 중단됐고 그로인한 경영난이 가중되자 조선제련은 총독부의 권고를받아들여 43년11월 장항제련소를 미쓰이계열의 삼성광업으로 넘기고만다.삼성광업으로 소유주가 바뀐뒤 곧바로 조업을 재개했으나 금대신조동생산에 주력했다.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동이 무엇보다도 필요했기때문이다. 45년4월부터는 총독부의 명령으로 군수공장으로 전환됐으며 그런 상태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후에도 55년 운크라사업으로 제2의탄생을 맞기전까지는 방치상태를벗어나지 못했다. 미군정청의 관할을 거쳐 48년8월15일 정부수립과 동시에상공부직할업체로 지정됐으나 제대로 가동된 적이 거의 없었다. 민족자본의 결핍과 국가재정의 빈곤으로 시설개보수를 위한 투자를 할수없었는데다 산업구조의 기형성으로 광물및 1차제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게다가 일제의 우민정책으로 축적된 기술도 없었고 숙련노동력도 부족했다. 실례로 48년 당시 장항제련소의 설비는 월3천t 의 원료를 처리, 2백t 의전기동을 생산할수 있는 규모였으나 동광석의 생산량은 월1백50t에 그쳤다.연광석의 채굴량은 월4백t 규모였으나 그해 장항제련소의 조연생산은 불과87t 으로 기록되어있다. 장항제련소를 현대식제련소로 다시 태어나게한 것은 운크라공사. 55년6월이승만대통령은 장항제련소를 시찰한뒤 육군의 운영지원단을 파견키로 함과동시에 운크라원조사업 대상공장으로 지정한다. 원조자금 1백55만7천달러와대충자금 14억6천만원이 투입된 이공사를 통해 용련공장을 철골조로 증개축하고 선광공장을 신설했다. 또 지상로를 철거하고 대신 전로와 정제로를 설치,제련조업을 혁신했으며 신형조동에 맞도록 전해로를 개조해 생산능력을 월2백t으로 확대시켰다. 해안선 제방1천3백m를 개축하고 장항역과 제련소간 철로인입선을 부설, 운송방식을 광차대신 철도화차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그에따라 연간생산량도 전기동 1천t,금6백kg,은7천kg,정연20t 등으로급증했다. 국내유일의 비철제련시설로서 제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산꼭대기의 굴뚝을 포함한 장항제련소의 사진이 국민학교 교과서에실린것도 이때이다. 이후 장항제련소는 운영회사의 간판이 상공부직할 삼성광업회사에서광업제련공사(62년2월1일) 광업제련(71년6월14일) 럭키금속(89년7월1일)등으로 바뀌는 변화를 겪지만 그때마다 시설을 확충해 오늘에 이르고있다. 특히 광업제련공사 시절인 65년에는 전기동의 매출이 총매출의 59.7%를 기록, 금 은의 33.7%를 압도함으로써 실질적인 산업시설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또 79년말에는 온산동제련소가 완공돼 국내비철산업이 2제련소체제로들어가기도 했으나 82년7월 광업제련(주)과 온산동제련(주)이 통합됨으로써양제련소는 분업체제를 형성한다. 현재 장항제련소에서는 연간 전기동5만t과 동파이프1만t ,스테인리스파이프 1만6천t ,무산소동3천8백t 을생산하고있다. 89년부터 용광로를 폐쇄,금제련은 하지않고있으며 전기동도조동 동설등 반제품을 들여다 만들고있다. 온산제련소에서는 전기동(22만5천t)과 황산(40만t)금(30kg)은(2백kg)등을 생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