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칼] (245) 제2부 대정변

이튿날 꼭두새벽에 주장인 사와와 히라노는 이쿠노를 탈출했다."후일에 다시 만나서 거병을 할수 있기를. "하고 헤어졌는데, 사와는 용케도로 조슈번으로 피신해 갈수가 있었으나, 히라노는 돗도리(조취)로향하던 중 붙들려서 교토로 압송되어가 옥에 갇혀있다가 이듬해 처형되었다. 항쟁파인 가와카미는 십수명의 동지들과 함께 유격전을 전개하려고 근처에있는 묘겐산(묘견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곧 같은 편이었던농병들의 공격을 받았다. 일부 농병들이 자기네를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켜놓고, 주동자들이 뿔뿔이 도주해버린데 대해 분노를 금치못하여 산으로들어간 항쟁파에게라도 분풀이를 해야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농병들의 손에 가와카미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사들이 무참히 살해당했고, 살아남은 몇몇도 도주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모두 자결을 해 버렸다. "이쿠노의 난" 혹은 "다지마의 난"이라고 일컬어지는, 히라노구니오미가주동이 된 거병은 그렇게 덧없이 끝나고 말았다. 그 이듬해 칠월에는 "하마구리 어문(합어문)의 변(섭)"이라고 일본의역사에 기록된 큰 충돌이 일어났다. 그것은 천주조의 난이나 이쿠노의난처럼 근황의 지사들에 의해서 발생한 무장봉기가 아니라,정식 번군이일으킨 전란(전란)이었다. 그러니까 막부를 상대로 한 최초의 대규모전투였던 셈이다. 말하자면 마침내 막부 타도전이 시도된 것이었다. 그 전란을 일으킨것은 조슈번이었다. 그무렵 조슈번이 존황양이의 기치를공공연히 쳐든 반막부의 총본산 격이었다. 조정의 정변때 쫓겨난존황양이파의 중신들 일곱 사람이 피신해 간 곳도 바로 조슈번이었다. 그 조슈번의 삼가로(삼가로)는 마스다우에몬노스케(익전우어문개),구니시시나노(국사신농),후쿠하라에치고(복원월후)였는데, 마침내그들이 군사를 일으키기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럴만한 까닭이있었다. 신선조(신선조)라는 친막부의 검객들로 구성된 행동대원들이근황의 지사 삼십여명이 비밀히 모여서 회의를 하는 이케다야(지전옥)라는여관을 기습하여 일곱명을 살해하고,나머지 거의 전원을 체포한 사건이일어났다. 그렇게 존황양이파에 대한 핍박이 극에 달하자, 정치공작으로는공무합체파를 조정에서 몰아내고,다시 천황을 자기네가 차지할수 없다는판단아래 드디어 무력을 행사하기로 결의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