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칼럼] 당귀차 한잔..이헌재 증권관리위원회 상임위원

나는 매년 단풍철이 되면 십수년전의 설악산행을 떠올리며 반성을 하곤한다. 그해 10월24일은 "유엔의 날"로 주말을 낀 연휴였다.아내와 함께 오세암에서 올려다 보는 설악의 단풍도 감상할 겸,마등령을넘어 설악동까지 종주하기로 했다. 꼭두새벽에 아침밥을 지어먹고 어린딸과 아들에게는 빌린 친구의 자동차로 설악동에 미리 가서 기다리라고하고 백담산장을 출발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두꺼운 겉옷은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장거리산행이 처음인 아내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 내옷들은 다 덜어낸 다음 배낭 하나로 짐을 꾸렸다. 설악산은 역시 큰 산이다. 나의 건방짐을 꾸짖기나 하듯 두시간쯤 지나자 날씨가 갑자기 변하더니 비가 내리고 기온이 떨어졌다. 이쯤에서 되돌아 갔어야만 했다. 그런데 되돌아가려니 번거롭기도 하고,코스가 짧은데다가 잘 알므로 그냥강행해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했다. 비는 점점 더 세차게 오고 산이 높아지면서 기온은 더욱 떨어졌다. 비로인해 점심도 못해먹고 얇은 잠바차림인 나는 떨어지는 체온과 체력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써야했다. 뒤처지다보니 순간적으로 인전마저 끊어지고 공포감만 더해갔다. 악전고투끝에 오른 마등령에서 마신 따끈한 당귀차 한잔과 금강굴 근처에서 만난 구조대의 화롯불이 우리를 살려주었다. 별탈없이 끝났기에 지금은 하나의 추억거리가 되고 가끔은 자랑삼아떠벌릴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정말로 무모하고 경솔한 등반이었다.상식으로 판단하고 고집으로 밀어붙이면 대개의 경우 통하기도 한다.여기에다 막연한 낙관론까지 곁들여지면 소신있는 지도자로 둔갑을 한다.그러나 한계상황에서는 요행이나 관행은 안통한다. 오히려 화를 부른다.때와 곳에 맞는 합리적이고 단호한 행동의 결정이란 결코 쉽지않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의 역량과 책임이 중요한게 아닐까. 나를 지도자라고믿고 따라주었던 아내가 당해야 했던 그 고통을 생각하면 미안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