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우륵의 예술

정부가 새해 "1월의 문화인물"로 신라시대의 악성 우륵을 선정한 것은금년이 "국악의 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정미의 음악(양악)에는 친숙하지만 오히려 우리 국악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정부가 금년을 우리 문화이며 우리 정서에 맞는 국악의 해로 정한것은 뜻깊은 일이다. 또 우리 음악의 대표적 악기인 가야금의 곡을 짓고 노래와 춤을 전수한 우륵을 새해의 첫 문화인물로 뽑은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할수 있다. 우륵은 가야국 가실왕과 신라 진흥왕때의 악사로 가야금의 명인이었다.우륵은 가야국 성열현에서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그 가야국이 어느가야이고 가실왕은 어느 가야국중의 몇대 왕인지 알길이 없다. 다만가실왕이 우륵에게 "모든 나라의 방언도 각각 서로 다른데 성음이 어찌하나일수 있겠느냐"며 가야금을 위해 곡을 지으라고 명해서 12곡을지었다는 것이 전해질 뿐이다. 우륵은 가야국이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들고 제자 이문과 함께 신라진흥왕에게 투항하여 왕은 그를 국원(지금의 충주)에 안치시켰다. 충주탄금대는 그의 가야금 연주를 기념하여 명명되었다 한다. 또 왕은 계고만덕 법지등을 우륵에게 보내 그의 업을 전습케 하여 우륵은 계고에게는가야금,법지에게는 노래,그리고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그뒤 이 제자들이 우륵이 작곡한 12곡을 듣고 "이 곡들은 번징음하여아정하지 못하다며 5곡으로 줄이자 우륵은 처음에는 크게 노했다. 그러나 5곡을 듣고 난뒤로는 눈물을 흘리며 "즐거우면서도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가히 아정하다고 하겠다"고 감탄했다 한다. 가야금은 옛 문헌의 한글표기에는 "가얏고"라고 쓰여져 있으므로가야금이란 가얏고의 한자화된 명칭이라고 생각된다. 삼국사기에는 가야국 가실왕이 6세기에 당나라 악기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4세기이전의 신라 공우중에 가야금이 발견되었고 중국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삼한시대에 우리 고유의 현악기가 있었다는 기록을 미루어 보면 사실왕때 중국 쟁의 영향을 받아 발전시킨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진흥왕이후 가야금은 신라에 널리 펴져 곡수가 184곡이나 되었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궁전과 민간에서 크게 애회되었었다. 새해에는 한층 우리것을 소중히 여기는 기풍이 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