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변화'라는 이데올로기 .. 김수배 유통부장

입만 열면 너도 나도 "변화"를 외치고 있다. 새정부 출범과 더불어 주로 정치권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변화라는 구호는 우루과이라운드(UR)가 타결되면서 "국제화"라는 구호와 맞물려 사회전반에 걸쳐 그 외침이 절정에 달하고 있는 느낌이다. 바로 엊그제의 냉전시대까지만해도 "반공"이란 구호 하나로 영달을 누렸던많은 사람들이 있었듯이 이제 변화라는 구호만이 자신을 살려줄 구명대라도되는양 주문처럼 외우고 다니는 사람들을 도처에서 만나게 된다. 우리의 근세사를 보면 시대의 조류가 크게 바뀔 때마다 뚜렷한 단죄의 대상이 있게 마련이었다. 해방직후에는 "친일파",한국전쟁이후에는 "빨갱이"군사독재시대에는 "반체제인사"가 그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요즘에는 일단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자로 낙인찍히면 직장에서든 사회에서든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월급은 주겠다. 변하기 싫으면 일하는 사람의 발목이나잡지말라"는 어느 대기업그룹총수의 감정섞인 막말까지도 선각자적발언으로 대접받는 풍토가 어느새 자리잡은 듯하다. 그러나 변화를 부르짖는 사람들중에는 자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으면서남보고만 변해야 산다고 으름장을 놓는 사람들도 적지않게 눈에 띈다.그들이 말하는 변화의 의미는 시류와 타협하고 새로운 권력에 아유하는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게된다. 집권세력은 UR타결후 "국내 쌀시장 사수"의 식언에 대한 농민반발을누그러뜨리고 쌀시장개방을 정당화하기위해 갑자기 변화와 국제화를필요이상 강조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량과 화합이라는 그럴듯한 구실을 내세워 "과거"와 손잡으면서겉으로는 변화와 개혁을 부르짖는 자가당착에 빠져들고 있다. 그들중에는변화나 국제화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도 상당수 끼여있어 국민을 어리둥절케하고 있다. 기업은 기업대로 앞장서 변화의 기치를 들고 "과거"의 목을 치고 있다.일부 기업주의 경우 그런 방법으로 과거 자신에게 씌워졌던 부정적 이미지를 단번에 걷어내고 신사고의 인물처럼 변신하는데 성공한 경우도 있다. 관과 기업에서 변화라는 칼을 휘두르는 사람들의 권위주의는 절대군주시대를 방불케할 정도로 서슬이 퍼렇다. 시대착오적 "충성론"이 세상을 우롱하는것도 그런 배경을 깔고 있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변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국민들사이에서는 "근본적으로 변한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팽배해지고 있는 듯하다. 페놀사건이후 3년동안 수질개선약속은 페놀거품처럼 스러지고 낙동강은더욱 더러워졌다. 10여년전에 대형사기극을 벌였던 범죄자가 가석방되자마자 다시 똑같은 수법으로 사기를 쳐도 변함없이 먹혀들어가는 세상이다.몇년전 백주의 납치범들을 상대로 선포됐던 "범죄와의 전쟁"은 이제 떼강도와의 전쟁으로 오히려 확대되고 있다. 툭하면 목적세나 신설해 모든 책임을납세자에게 전가해버리는 행정편의주의적 사고방식도 예전 그대로다. 과거 군사정권시절에도 공무원의 복장은 물론 시민의 두발형태까지바꿔버릴 정도로 강도높은 변혁이 시도되곤 했었다. 그런데도 역사는 그들의 개혁이 어느것 하나 제대로 성공했다는 평가를내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얼마못가 또다른 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리곤하는참담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개혁의 동기가 불순했고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의 자기희생이전제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지금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단은 제대로 갖추지 못한채 그저입으로만 변화를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떨어져나간 자리에 혹시 "변화"라는 새로운이데올로기가 슬그머니 들어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변화란 과거와의 단절에 머물러서는 의미가 없다. 과거란 그저 흘러가없어진 시간이 아니라 현재속에 피처럼 용해되어 있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로 과거는 청산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일뿐이다. 보다 나은 미래로 가기위해 밟고 넘어가야 할 발판인 것이다. 바탕으로부터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동기부여도,합리성도 결여한채무조건 변하라고 윽박지르기만하는 돌림병같은 풍조부터 극복돼야 하지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