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비망록] (172) '중공업' 출발..조중훈 한진회장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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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그룹이 육.해.공종합수송 기업집단으로 발전하는등 안정 궤도에오르게 되자 나는 시대 흐름에 맞춰 기업도 발전적 변화가 필요하다고생각했다. 이에 따라 내 평생 천직으로 생각해온 수송사업의 개념을 한 차원 높여 "종합물류그룹"으로의 도약을 21세기에 대비한 새로운 목표로 설정했다. 육.해.공복합적인 수송에만 만족할것이 아니라, 물적유통 체계의 선진화와 국제화를 통해 국가경제 발전에 한층 기여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기회 있을 때마다 언급했지만 나는 남의 모방이나 하는 사업, 잘 모르면서도 무모하게 욕심만 내는 사업을 싫어했다. 따라서 내가 벌여온 대부분의 사업이 수송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항공기 생산 외에는 제조업 분야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러한 나의 신념이랄까 수송에의 집념으로 인해 그룹 내에 별도로 간판을 내건 제조 부문회사가 없다보니 사업 규모에 걸맞지 않는다는 소리를 자주 들어왔다. 그런 의미에서 한진의 조선공사 인수는 주변의 관심을 끌었던 것같다. 나로서는 명실상부한 종합물류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해운뿐만 아니라조선사업도 겸비해 제조사업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이었다. 한진그룹이 조선공사 인수에 적극적으로 나섰던데에는 한진해운의 외항선36척을 비롯 그룹내에 각종 선박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이들의 자체 수리를 위한 조선소의 설립도 검토하고 있었다, 어차피 새로만들 계획이라면 어려운 위기에 처해있는 기업을 인수해 되살려 보는 것도바람직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87년에 인수한 대한선주의 선박은 10년 이상된 중고선이 전부인데다 한진해운이 보유한 선박들도 적지 않게 낡아 교체를 위한 조선소 매입이 절실하던 터였다. 입찰 가격이 8백62억원에 달했는데 다소 무리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그룹이 보유한 선박의 자체 수리및 교체를 위한 조선소로 활용하면 낙찰 가격과 인수 조건에 관계없이 수익성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조선공사 인수후 가장먼저 해야할 일이 노사화합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2년넘게 주인없이 떠돌던 회사라 새롭게 적응하는데에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것은 자명했다. 또한 조선공사노조는 한국의 노조발생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시찰차 처음으로 부산의 영도조선소에 도착했을때 노조원 2천여명이 임금인상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어 노사관계의 골을 실감했다. 이런 어려움을 개선하고 생산성향상을위해 신규시설투자와 함께 노후시설개보수와 직원의 해외 기술연수, 해외견학등을 추진하였다. 또한 화합의분위기를 마련하고자 복지후생 증진과 근무환경개선외에 국내 기업중최초로 회사내에 산업대학을 개설하는등 지속적인 투자를 해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한진그룹 가족으로서의 동질성을 갖추기 위해 회사구조를재편성하여 (주)한진중공업으로 상호를 바꿨다. 신조선, 수리조선 및종합기계를 망라한 중공업회사로 새롭게 출발했다. 이러한 노력이 진행되는 동안 인수후 자체물량으로는 처음으로 90년8월대형 신조선 한진카오슝호를 진수했다. 한진중공업은 한진그룹의 도약과 변신을 대변하는 업체가 되어 수송과 종합물류기기를 생산하는 종합중공업체로 발돋움했다. 뿐만아니라 타 조선소에 앞서 LNG선 건조에 필요한 기술도입 계약등을외국과 체결하고도 더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돼 이의 추진에박차를 가했다. 이 과정에서 직접 프랑스를 몇차례 방문하며 연구를 거듭하고 국내 업체들과의 경쟁등 우여곡절끝에 92년 초가을부터 한국최초의 멤브레인형 LNG선 건조를 맡게 되었다. 나는 3년동안 진행될 이 최첨단 고부가가치 LNG선의 완벽한 건조가 한진중공업의 새로운 도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첨단전동차등 철도차량의 양산체제구축과 함께 항만 수송기기 제작등 21세기에 대비한 장기지표에 따라 종합물류기기 제조업체로 발전하는자신을 갖는 계기도 되리라 믿고 있다. 경영과 기술, 자본과 땀의 결합으로 세운 목표의 달성이 곧 회사발전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