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3통의 편지..류화선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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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은행의 고참 임원 한사람을 만났다. "은행장 한번 하셔야죠" "은행장요. 그걸 하려면 지금쯤 은행을 떠나다른 곳에서 일해야 할텐데 어디 마땅한 데가 있어야죠. 또 된다한들파리목숨 아닙니까" 은행장이 되기위해서 은행을 떠난다. 발상치곤 참희한한 발상이다. 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그 말에도 "일리가 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얘기인즉 은행은 돈을 다루는 곳인만큼 사고의 개연성이 많고, 사고가 나면 문책인사가 있을 게고, 그래서 징계라도 받으면 현행 규정상 은행장에 선임될 수 없으니, 은행을 일단 떠났다가,동료임원들이 사고를 당해 은행장 후보자격이 박탈되면, 그때 가서 은행장으로 금의환향한다는 것이다. 씁쓸한 얘기다. "은행장=파리목숨"이라는 표현도 매우 자조.자학적으로들린다. 외환은행의 "한국통신주 응찰가 수정사건"으로 허준행장이 물러나면서금융계의 분위기는 이렇게 돌변해 있다. 어떻게 보면 반발심리가 내재화된 것으로도 볼수 있다. 문책의 잣대가 뭐길래 유독 우리에게만 화살을 돌리느냐는 것이다. 사실 어떤 사고가 나고 위기가 닥쳐도 이러 저러한 변명을 댈수가 있다.한 20년전쯤 미국의 어느 최고경영자가 사표겸 남겼다는 "3통의 편지"를예로 설명해 보자. 그는 후임자에게 "자네가 앞으로 곤란한 지경에 빠지면 이 편지를 차례로 뜯어 보게"라는 말을 남기고 회사를 훌쩍 떠났다고 한다. 어느날인가 경영위기에 봉착한 후임자는 첫번째 편지를 뜯었다. 거기엔"내(전임자)탓으로 돌려라(Blame on me)"고 쓰여 있었다. 그는 전임자가 경영을 엉터리로 해 회사가 이 지경이 됐다며 위기를넘겼다. 또다시 난관에 부딪쳤을때 그는 전임자의 두번째 편지내용대로"환경 탓(Blame on environment)"을 했다. 전임자 잘못 또는 환경탓-. 이건 우리사회에서도 숱하게 보아온 터다.특히 정부가 위기를 맞으면 으레 이 방법들이 동원됐다. 노태우정부가 "5공때문에"라는 말을 자주 읊조린 것이나 현정부가 출범초기 그렇게 많이 6공으로 화살을 돌린 것은 전임자를 탓한 경우다. 쌀시장 개방에 따른 어려움을 수습한 우리정부의 위기타개방법은 환경탓으로 돌린 대표적 케이스다. "우루과이라운드(UR)와 국제화때문"이라고. 우리사회가 즐겨 애용하는 카드는 또 있다. 한국식 3번째 편지라고나할까. 그건 "아래로 책임을 떠넘겨라"는 것이다. 은행장이 파리목숨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책임이 모두 "아래 탓"으로돌려진 때문이라는게 은행사람들의 시각이다. 견강부회같지만 그들은지난해 장영자사건으로 그만둔 김영석서울신탁은행장과 선우윤동화은행장도 "아래 탓"이란 화살에 희생됐다고 말한다. 장씨 사건은 무엇보다 제도금융권과 사채시장에 걸친 구조적인 문제에원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두 행장은 취임한지 불과 몇개월도 안돼 당했다는 점도 강조한다. 비록 금융실명제 위반이란 반통치권적 사안이긴 했어도 얼마든지 전임자를 탓할수도 있었고 "저급"하기만 한 우리의 금융환경을 나무랄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조직의 장 이전에 감독당국이 네탓이라며 지목한 아랫사람이어서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사표를 던졌다는 말도 한다. 허준행장의 사임도 다를게 없다는 반응이다. 감독당국과 상의없이 응찰가를 바꿨다해도 그는 정부주식의 입찰을 대행한 산하기관의 장인 이상아랫사람탓을 옴팍 뒤집어 쓴 것이라는 얘기다. 은행사람들의 이같은 정서를 뒤집어 해석하면 감독당국의 책임은 도대체 어디 갔느냐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옳건 그르건 그걸 여기서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은행사람들을 편들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 스스로 행장의신상에 이상이라도 생길라치면 옆방에서 웃음소리를 흘렸던 사람들이니자업자득으로 보면 그뿐이다. 문제는 마구잡이식 "인재 폐기처분"에 있다. 사고가 났다하면 은행장은그렇다치고 전무 상무등 줄줄이 족쇄를 채워 은행장도 바라볼수 없는 "몹쓸 인간"을 양산하는게 과연 바람직하느냐는 점이다. 200여년전 정다산은 "온 나라의 영재를 다 끌어모아 쓰더라도 오히려부족할까 두려운 마당에 10분의 8,9를 버려서야 되겠느냐"고 지적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은행의 인재는 지금 10분의 10이 버려지고 있다. 인재를 살리는 방법은 과연 없는건가. 미국의 경영자가 남겼다는 맨 마지막 세번째 편지를 뜯어보자. "이젠당신도 후임자에게 3통의 편지를 써라(Write three letters to the suc-cess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