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경제관료] (10) 제1편 갈등속의 변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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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싹---. "장군이면 다냐" 지난 90년초 동자부(당시) 박모사무관이 육군장성 출신최성택 유개공사장의 뺨을 냅다 후려치며 내뱉은 말이다. 장소는 상공위원회가 열리고있던 여의도 국회의사당 소회의실. 중인환시리에서 였다. 사건의 발단은 전국 송유관부설공사를 최사장이 어렵게 만든데서 비롯됐다. 그는 "군맥"을 배경삼아 동자부가 석유사업기금으로 추진하려던 이 공사를독식하려고 했다. 유개공이 자회사를 만들어 그 일을 떠맡아야 한다는게 그의 주장이었다. 화가 치밀대로 치민 박사무관은 급기야 국회회의실로까지 쳐들어가 "장군"의 뺨을 후려치는 것으로 울분을 삭인 셈이다. "사건"직후 박사무관은 사표를 쓰고 "고달픈 공직"을 마감했음은 물론이다. 90년8월 어느날 권녕각당시건설부장관이 건설부 회의실에서 조회사를시작하려는 순간 사무관급 직원들이 집단퇴장해 버린다. 그들은 이내 연판장을 돌리는등의 집단항명사태를 일으킨다. 장관의 밀어붙이기식 기구축소에 반대한다는 것. 결과는 사태의 "주모자" 13명이 직위해제 등 징계를 받는 것으로 이어진다. 기술직출신 안모사무관이 "군사재판식 징계"에 반발해 사표를 내던진다. 위아래 가릴 것없이 경제관료들이 "먹을 떡"도 많았고 자부심도 대단했던시절의 "흘러간 일화"들이다. 불과 몇해전까지의 일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젊은 경제관료들의 "과천고별"은 이런 식으로나 이뤄졌었다.경제관료의 정상적인 퇴직은 "할만큼 해본" 국장급 이상 고위관료들에서나찾아볼 수 있었다. 그것도 산하경제단체나 조합에 "자리"를 만들어 나가는 방법으로. 말하자면 낙하산을 전제로 한 퇴직이었다. 이유는 박봉이니 뭐니해도 그들에겐 "공직"을 대신할 매력있는 일터가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민간기업으로 가는 건 "신분강등"쯤으로 받아들여졌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금은 그러나 영 딴판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젊은 관료들의 전직이 줄을 잇고있다. "잘 나가던" 중앙정책부처의 중견과장이나 사무관들이 어느날 갑자기 사표를 내던지는 일이 심심치않다. 몇일 지나면 민간기업에서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이 이어진다. 작년5월 경제기획원에서 과장승진을 눈앞에 둔 14년차 고참사무관이 중소기업의 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연공서열만이 강조되는 답답한 관료사회풍토, 거기서 무슨 비전을 찾겠냐는게 그의 전직이유였다. 비슷한 시기에 재무부에서도 일이 벌어졌다. 가장 끗발있다던 이재국의 이모사무관도 벼슬살이를 그만뒀다. "가업을 잇는게 차라리 낫겠다"면서. 얼마전엔 또 행시와 사시에 모두 합격한뒤 "정책수립업무에 더 매력을 느껴" 보사부를 지원해 근무해온 사무관이 자퇴했다. "관료를 두들겨패기만 하는" 사회분위기에 좌절감을 느꼈다는 설명과 함께 변호사로 돌아섰다. 요즘 전직열차는 "사무관용"만도 아니다. 40대를 넘긴 중견과장들도 인생행로의 열차를 갈아탄다. 상공자원부에선 고참과장이 국내굴지의 대기업 임원으로 내정까지 받은상태에서 장.차관등 선배들의 만류로 뜻을 꺾은 일도 있었다. 하지만 경제기획원에서는 지난3월 민자유치법을 담당하던 중견과장강모씨가 신문사로 옮겨가는 "실천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강과장이 사표를 내자 기획원차관이 "그 친구 공무원생활 오래 못할줄 알았다. 관료해먹으려면 "안된다"는 일은 아예 체념해야하는 법인데 끈덕지게 상사를 설득하려고 쇠심줄을 부렸으니."라고 혀를 찼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문제는 이처럼 중도퇴진하는 젊은 관료들은 대부분 "경쟁력 있다"는 소리를 들어온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나가봐야 별 볼일 없을 친구들은 붙박이로 남아있는데 아까운 인재들이자꾸 과천을 떠나는게 안쓰러울 뿐"이란 얘기도 나올 정도다. "앞길이 창창하고,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자발적으로 "신분보장이 되고직장이 안정돼서 좋다는" 중앙경제부처를 그만두고 인생항로를 바꾸는까닭은 무얼까. 관료사회의 "배출요인"과 민간기업의 "흡입요인"이 함께 맞물려 작용하고있다는게 정설이다. 배출요인중 가장 큰건 경제발전을 주도하고 있다는 자부심(Pride)과 승진기회(Promotion), 힘(Power) 등 이른바 "3P"가 없어진데 있다고 한다. 새 정부들어 경제관료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정치인이나 재계인사들의 발언권은 점점 커지고있는데 따른 좌절감도 적지않다. 경제성장을 이끌어온 프론티어쉽도 이젠 한계에 부닥친 것 아니냐는 위기감도 고조되고 있다. 복지부동하게 된 공무원들의 처지를 찬찬이 따지기보다는 "복지부동하는공무원도 사정하겠다"는 식의 즉흥적인 대응을 일삼는 정권에 대한 불만도크다. 관가에서 우수한 공무원들을 "밀어내는" 힘이 이처럼 큰데다 민간쪽에서"끌어당기는" 힘 또한 세다. 무엇보다도 "과천"에서는 호흡하기가 어려워진 "자유로운 공기"가 있다는 점이다. 상대적이긴 해도 창의력을 발휘할 기회가 60, 70년대엔 경제관료들에 더있었다면 요샌 "아무래도 민간쪽"이란게 관료들 스스로의 진단이기도하다. "이젠 경제의 시대가 아닌 경영의 시대"라는 말이 시사하듯 경제의국제화와 개방화가 급속히 진전되면서 "관에서 민으로의" 권력이동(PowerShift)도 빠른 템포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사회가 바뀌어도 관료만이 해야 할 기능은 언제나 남는다"(미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 예컨대 UR과도 맞물려 기업국제화가 진전되면 될수록 "기업의 이익과국가의 이익이 일치하지않는 부분이 확대될 수도 있다"(이상무농림수산부농업구조정책국장). 이런 "이익의 괴리"문제를 조정하면서 기업국제화를 거시적으로 조장하는관의 기능이 보다 중요해진다는 얘기다. 그럴수록 "엘리트집단"으로서 경제관료의 역할을 고무하고 격려할 제도적장치는 시급해진다. 아직은 대부분 경제관료들이 "현실을 투덜대면서도 행동에는 옮기지못하는" NATO(No Action Talk Only)족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과감하게 민간으로 떠나가는 RAAT(Real Action As Talk)족이 점차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경제관료사회는 분명 "위기의 전환점"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