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칼] (488) 제3부 정한론 : 서장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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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크, 이것들이 뭐야!" 놀란 오무라는 냅다 고함을 지르며 몸을 피했다. 위기를 용케 모면한 그는 재빨리 대검을 빼들고 맞섰다. "이 배신자야! 너를 죽이러 왔다!" "배신자라니, 나는 병부대신 오무라다! 썩 물러가지 못할까!" "병부대신 좋아하는구나. 이놈아! 칼 받아라!" 자객들과 오무라가 한바탕 칼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뒤늦게 기습을 당한것을 경호병들이 달려왔다. 여관이 벌컥 뒤집히는 난전끝에 자객들은 물러가고, 오무라는 크게 부상을 입었다. 오무라의 병제 개혁에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이었던 것이다. 고향행을포기하고, 교토에서 치료를 받다가 오사카로 옮긴 오무라는 두달 뒤에 결국 그 상처가 악화되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병을 바로잡으려다가 병에 의해서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가 추진했던 징병제가 결실을 맺어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은 죽은 뒤사년만이었고, 패도금지령이 선포된 것은 칠년 뒤의 일이었다. 결국 병제의 개혁은 그의 계획대로 실시가 되었지만, 너무 앞질러 나갔기 때문에 그는 희생을 당한 셈이었다. 오무라는 죽덕 그해, 도쿄에 초혼사라는 것을 건립했었다. 막부 타도전에 관군으로 참전하여 숨져간 전사자들의 혼백을 한데 모아 제사지내기 위한 사당인 셈이었다. 그것이 나중에 야스쿠니신사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메이지다이쇼, 쇼와 연대로 이어지는 동안 내전이나 침략전, 즉 대만 정벌,청일전쟁, 노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그리고 제이차세계대전인태평양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영혼을 봉안하고 있다. 그 수효가 무려 이사오만이나 된다. 오무라가 죽기 앞서 그해 정초에는 참여(차관급)인 요코이쇼난이 자객의 기습을 받아 그자리에서 즉사했고, 일년 남짓 뒤에는 참의(태정관의 고관으로 부총리격)인 히로사와사네이오미가 역시 자객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니까 불과 이년 남짓 동안에 정부의 고관이 세 사람이나 자객들에의해서 죽어간 것이다. 얼마나 사무라이들의 불만이 컸던가를 알수가있다. 그들의 불만은 비단 암살이라는 수단으로만 표출된게 아니라,집단으로공공연히 터져나오기도 했다. 조슈번의 기병대의 반란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조슈번에는 번군이라는 정병외에 기병대라는 것이 별도로 조직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