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기우와 극서

조선조의 군왕은 흉년을 몰아 오는 가뭄을 무엇보다 두려워 했다. 인간의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그런 변이 일어나는 것은통치자인 임금의 부덕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임금이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선정을 펴나가면 천지의 화기가 감응, 농사에 알맞게 비가 내리고, 그렇지 못하면 백성의 원망과 환탄을 불러일으켜 화기가 깨어지고 어그러져 한재나 홍수가 일어나게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왕은 동시에 우사(rain maker)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야 했다.신하들이 절대군주의 실정을 터놓고 공격할수 있었던 때가 가뭄이나 홍수등의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였다는 것은 퍽 흥미있는 일이다. 가뭄이 계속되면 왕은 고행하는 수도자처럼 근신을 해야했다. 가무를 금했고 반찬의 수를 줄였으며 정전에서 국사를 보지 않았다. 죄인처럼 반성하면서 신하들에게 직간을 청했다. 그리고 나서는 명산대천에 대신들을 파견해 신우제를 올리게 했다. 조선조의 기우제는 빈도가 잦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매년 여름철의 연중행사였다. 그 한예로 조선후기의 현종은 재위15년간 31회의 기우제를 지냈다. 태종 역시 재위18년간 한해를 빼놓고는 매년 2~3회의 기우제를지냈고 16년 한해동안에는 무려 9번의 기우제를 올렸다. 한편 민간이나 지방관청에서도 기우제는 물론 온갖 주술적인 방법을동원해 비를 빌었다. 마을 사람들이 산위에 장작이나 솔가지를 산처럼쌓아놓고 불을 질러 양기인 불로 음기인 비구름을 불러들이는 "산상분화"라는 의식을 치렀다. 집집마다 처마끝에 버들가지나 솔가지로 마개를한 물병을 거꾸로 매달아빗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하게 매달아 빗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하게하는유사주술행위도 벌였다. 대중들이 모이는 시장을 옮기게 하는 풍속도있었다. 어린이들을 동원, 물독에 도마뱀을 넣고 "비를 내리게 하면 놓아주마"고 외치며 물독을 두드리게 하는 방법도 썼다. 그래도 비가오지 않으면 사람들이 더워도 모자나 부채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면 모두 우스꽝스러운 짓에 지나지 않겠지만 자연을거스리지 않고 그것에 순응하려는 농경민의 순박한 마음과 가뭄극복의의지를 읽을수 있는 민속들이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모자나 부채도 쓰지 않고 비를 기다렸던 그들과 상점에서 중고에어컨 냉장고까지 동이 나버렸다는 우리들의 현실이 너무 대조적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