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칼] (575) 제3부 정한론

"이게 무슨 짓이야? 기리노!" 혼자 차를 마시고 있던 오쿠보는 깜짝 놀라 두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며 마주 고함을 질렀다. 양볼의 구레나룻이 버르르 떨리고 있었다. "사쓰마의 명예를 더럽히는 너같은 놈은 맛을 단단히 좀 봐야 된다구.동향의 선배도 모르고, 죽마고우로서의 우정도 저버리며 오직 권력만추구하는 똥돼지 같은 놈! 이놈!" "아가리 닥치지 못할까! 저놈이 눈에 보이는 것이 없구나. 권력을 추구하기는 누가 권력을 추구했다는 거야!" "그래도 입은 있어서 큰소리를 치는군. 뻔뻔스러운 놈! 그래 사이고 도노를내쫓고나니 이제 속이 후련하냐? 네 맘대로 천하를 주무르게 돼서 기분이 좋으냐 말이다" "내쫓기는 누가 내쫓았다는 거야? 자기가 스스로 물러난 거지" "무엇이 어쩌고 어째?" 기리노는 냅다 내리칠 듯이 군도를 번쩍 쳐들었다. "너 이놈! 나를 죽일 작정이냐? 너야말로 동향의 선배도 모르는 망나니로구나. 나를 죽이면 너는 물론이고, 사이고도 역적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이번 결정은 천황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거다. 알겠느냐?" 오쿠보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듯 태연하게 앉아서 기리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야, 이놈아! 가짜 수염을 달고 위엄을 부리려는 이 꼴불견아. 자, 맛좀봐라. 에잇!" 순간 군도가 휙! 바람을 일으키며 번쩍 빛났다. "으악..." 비명과 함께 오쿠보는 앉은채 뒤로 벌렁 넘어졌다. 기리노는 군도를 거두고 후닥닥 돌아서 성큼성큼 사라져 갔다. 정신을 차린 오쿠보는 칼이 스친 듯한 한쪽 볼때기를 손으로 만지면서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그 볼때기의 구레나룻이 싹뚝 잘렸을 뿐 아무데도 베인데는 없었다. 그저 정신이 얼얼하여 한참 넋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기리노는 일부러 칼끝으로 그의 꼴불견인 구레나룻만 자르고 사라졌던것이다. 사이고가 정식으로 사표를 제출하고 도쿄를 떠난 것은 며칠 뒤의 일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보좌관 두사람만 데리고 요코하마 항구에서 가고시마로 가는범선에 몸을 실었다. 배가 차츰 뭍에서 멀어져 갈때 사이고는 갑판위에 서서, "내가 할 일은 이제 끝났군" 하고 중얼거리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착잡하고 쓸쓸한 심정으로 도쿄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