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비망록] (204) 김준형 행남자기회장 (6)..귀국과 취직

일본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점원 심부름꾼 배달원등 대개 그런것 뿐이었다. 그래도 숙식이 보장되는 일을 하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하는 곳에서 먹고 자고, 그리고 차츰 돈이 모아지자 학원엘 들어갔다. 먼저 3개월 과정의 부기학원에 들어갔다. 장차 사업을 하려면 부기는 반드시 익히고 있어야 할 필수과목이었다. 다음엔 낮에 일을 하면서 밤시간을 이용할 수 있는 야간중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처지의 고학생들이 대부분인 야학이 제대로 운영될 턱이 없었다. 차츰 낮 동안의 일에 지친 학생들의 결석이 늘어갔다. 그러니까 처음 3개월 정도는 정상적으로 수업을 받았지만 이후에는 그만 야학이 문을 닫고 말았다. 물론 그보다 훨씬 여건이 나은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싶은 생각이야 꿀떡같았지만 생각과 달리 당시의 내 처지로는 도저히 감당할 엄두가 나지않았다. 그렇듯 차일피일 시간을 미루다 결국은 일본 생활 3년만에 실로 외롭고 고달프기 그지없었던 내 일본생활을 마감하는 수밖에 없었다. 돌아온 고국땅 목포는 내가 청운의 꿈을 품고 일본행 배에 몸을 실을 때와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장남을 어머님은 반가히 맞아주셨다. 그때 내 나이 이미 스무살. 비록 배움의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장차의 일을 생각해서라면 무언가새로운 변신을 시도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들어가게 된 목포에서의 첫 직장이 "송정도매상"이라는 잡화점의 장부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 일은 오래 가지는 못했다. 한창 의지에 불타는 젊음이 그렇듯 작은 점포에서 청춘을 보낸다는 것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을 성 싶었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아버님께서 가까운 바다 건너 해남군 황산면 성산에 있는 일본전기공업주식회사란 곳에 일자리가 하나 났다고 말해주셨다. 지금이야 폐광이 되어버렸지만 그당시 성산 광산은 전남일대에서도 규모가크기로 이름나 있었다. 그러니 자연 웅지를 펼치기에 좋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이전부터 아버님께서 익히 알고 지내던 일본인 오스카 요네스란사람의 신원보증을 받아 취직했다. 총무과에서 인사 문서 작업관계의 서류들을 담당하는 일이었다. 그 광산은 명반석을 채취해 분쇄공장에서 가루로 만들어 일본으로 실어가는곳이었는데 광부들과 분쇄공장 선착장등을 합해 인원이 거의 3,000명을 헤아렸다. 그때 내가 임금계산을 했었는데 보름마다 한번씩 현장 근로자들에게 지급했던 보수가 2,000~3,000원은 넉히 되었다. 아마 그때 돈 1,000원이라면 요즘 돈 1억원정도나 됐을 것이니 그만큼 규모가 컸다는 얘기다. 거기에서 채취된 명반석은 알루미늄 원료가 32%나 함유된 양질의 것이었는데 이것이 각종 제련재료로 쓰였고 나머지 68%의 찌꺼기를 이용해 칼리비료를 만드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조선인 근로자들이 현장일을 하는 임시직인데 반해 나는 어엿한사무직 준사원이었다. 당시 회사내에 조선인 정사원이 2명 준사원이 1명뿐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가히 나에게 주어진 취직조건은 파격적인 셈이다. 그곳에서 내가 받았던 매달 월급이 31원, 당시의 화폐가치로 따진다면상당히 많은 액수였다. 그무렵 괜찮다고 알려진 면직원 한달 월급이 18원, 쌀1가마에 3~4원, 정종한홉에 8전이었다. 내 한달 월급으로 쌀 열가마를 살수 있었으니 이전의 내 수입에 비할바가 못되었다. 물론 이것을 꼭꼭 모아갔다. 장차 내가 어떤 일을 하든지간에 이돈이 긴요하게 쓰일터였기 때문이었다. 숙식은 회사 내 직원들을 모아놓은 합숙소에서 해결했다. 그런데 처음엔 그런대로 지낼만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산중생활이 지루하기그지없었다. 보이는 건 모두 거친 광부들과 분쇄공장의 굉음뿐이었다. 회사에서는 이런 합숙소 사원들의 사정을 헤아려서 매월 1일과 15일은 정식으로, 그리고 수시로 기회있을 때마다 술을 무료로 나눠줬다. 난 그곳에서 처음으로 술을 배워 틈만 나면 나는 그곳 종업원들과 가히 폭주에 가까운 술을 마시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