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 창간30돌] 화교사회 이주사..600년전 첫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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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는 5백~6백년전부터 동남아지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초기 화교사회는 중국 남부해안지방인 복건성과 광동성으로부터 남하한소수의 상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유럽의 식민제국들이 동남아지역에 서구경제제도를 접목시키면서 중국상인들은 이들과의 거래를 통해 적잖은 부를 축적할수 있었다. 당시 소수의 중국상인들은 지칠줄 모르는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항구도시를옮겨다니며 동서양무역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중국상인들은 17세기까지 남지나해 전역에서 포루투갈 스페인 네덜란드인 그리고 토착원주민들과 거래했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면서 마닐라에 복건성으로부터 온 화교상인촌이 형성됐다. 이들은 멕시코와의 은.실크무역에 종사했다. 대만도 17세기 중국상인들에의해 일본과의 무역근거지로 개척됐다.네덜란드인들은 말레이군도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보다 숙련된 노동력을 찾았다. 식민세력들은 서구와 동남아를 연계할수 있는 중간매개인을 필요로했으며 중국인들이 적격으로 꼽혔던 것이다. 서구인들의 시각으로 볼때 남부지역 중국인들은 이상적인 중간상인이었다. 그들은 전통동양경제에 얽매여 있지 않았으며 서구경제체제의 일원도 아니었다. 유럽의 유태인상인과 마찬가지로 두 체제 모두에 동화될수 있었다. 1786년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말레이시아 페낭에 설치되고 싱가포르도 영국인의 손에 의해 개항됐다. 영국은 말레이군도에서의 상거래를 독점하고 있던 네덜란드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페낭과 싱가포르를 자유무역지대로 선언했다. 이를 기점으로 중국상인들은 발빠르게 이 지역에서의 세력을 확대하며 초기화교사회를 이끌었다. 동남아지역으로의 중국인 이주는 노예제도가 폐지되면서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1833년 영국을 시발로 1870년까지 포르투갈 미국 스페인등이 잇따라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1860년 중국은 영국과 맺은 북경조약으로 그때까지 금지됐던 중국인의 해외송출을 허용했다. 이는 산업혁명으로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던 제국주의 본국및 식민지개발을 위한 인력수요와 맞물려 중국인의대규모 인력송출을 야기했다. 홍콩에서부터 자카르타,대만에서 싱가포르,그리고 방콕에서 콸라룸푸르에 이르기까지 동남아전역에 화교들이 대규모로 정착했다. 북미의 철도건설및 탄광개발,카리브해및 남아메리카의 대규모 농장개발에 까지도 상당수가 중국인력으로 채워졌다. 싱가포르는 곧 중국인 계약직 노동자들의 수출항구로 발전됐다. 1847년부터 30여년간 50여만명의 중국인들이 이주했다. 이주는 산발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광동성 복건성에서 촌락째로 이주하는경우도 허다했다. 계약노동자로 각지에서 활동했던 중국인들이 계약종료후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예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현지에 정착, 밑천이 덜드는 구멍가게등을 열고 가족단위생활을 꾸려가며 낯선 땅에서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를 지켜갔다. 광동성과 복건성을 중심으로 중국인들이 고향땅을 등진데는 정치 경제 사회적 요인들이 복합돼 있다. 당시 중국의 경제는 제국주의 서구열강에 의해 황폐화됐다. 식민지적 생산관계가 고착되면서 모든 재원들이 수탈됐다. 대부분 가난과 기아선상에서 근근이 목숨을 부지해야했다. 유교문화는 근검절약 교육열 가족애등의 가치를 강조했지만 상인기질은 억눌렀다. 상인들은 가류주구에 시달렸다. 상인은 사 농 공인계급에 이어 사회의 가장 밑바닥 인생으로 취급받았다. 서구의 부정과 부패물결을 유입하는 음모세력으로서도 억압받아 외국과의 상거래는 금지되기 일쑤였다. 지배이데올로기와 전제관리들의 횡포,그리고 서구열강들의 경제적 수탈은 이들의 고향에 대한 애착을 말끔히 씻어내 버렸다. 중국본토에서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인 경험은 세계 각지로 이주한 화교들로 하여금 경제적인 부에 집착케했다. 이들은 곧 동남아각국 경제계의 중심세력으로 자리잡았다. 소수화교들은 오늘날 이들 국가의 경제성장에 대한 견인차역할을 했다.화교들의 삶에 대한 태도는 또한 이지역 국가의 생활문화로 자리잡게됐다. 화교들은 그러나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화교들은 2차대전당시 유럽의 유태인들과 같이 정치선동가들의 구미에 맞는 표적이 됐다. 태국에서와 같이 토착민과 화교간 분쟁이 없었던 지역은 드물었다. 지난 65년 인도네시아에서는 공산혁명이 실패한 이후 수천명의 화교들이 학살됐다.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도 69년 마찬가지 사태가 벌어졌다. 70년대 초반이래 말레이시아정부는 공직이나 대학입학,기업의 주식소유등에 대해 쿼터제를 도입,화교에 대한 공공연한 차별대우를 지속해왔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화교학교설립을 불허하고 있으며 공문서에 중국어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자신들의 몫을 독식해버리는 화교란 토착민들의 이같은 피해의식은 끊임없는 종족간 분규요인이 되고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