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시론] 행정과 부처소신주의..이건영 국토개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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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조직이 대폭 개편되고있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통합되고 건설부와 교통부가 통합하기로 되었다. 그리고 다른 경제부처들도 여러모로 달라지고 있다. 세계화라는 시대의 큰 흐름에 따라 우리의 행정조직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번 행정개혁은 대체적으로 국민적 공감을 얻고있는 것 같다. 개발독재시절 한두 사람이 모든것을 통괄할 때의 권위주의적 행정조직으로 새 시대를 헤쳐나갈수는 없는 것이다. 바뀌어야 하는것은 조직뿐이 아니다. 행정관행이나 스타일도 새롭게 달라져야 한다. 무엇보다 각 부처가 소신과 책임을 가지고 일할수 있는 틀이 조직체계에 반영되어야 한다. 국가행정은 국가의 리더십이다. 그대로 국민경제와 직결된다. 능률적이고 효율적이어야 한다. 커다란 줄기가 뚜렷하고 일관된 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되돌아보자. 최근 여기저기서 굵직한 사건들이 터지는데도 복지부동하던 공무원들은 몸사리고 책임전가에 급급하였다. 뿐인가. 무언가 빨리 결정하고 추진해야할 정책사안들이 마냥 겉돌고 쌓여가고만 있었다. 이런 사안일수록 때를 놓쳐서 얽히고 꼬여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일이 있을때마다 정책조정의 역할을 강조하는 소리가 높다. 가령 교통의 경우 육.해.공이 따로 놀고 있다거나 개발과 환경,기술개발과 산업정책등 몇개의 부서 이해관계가 얽힌 사안들이 잡음을 일으켜왔다. 이때마다 새로운 정책조정기구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그래서 모든 관련 부서를 꼼짝 못하게 통솔할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당 청와대내의 기구를 지칭하는 경우도 있고 위원회가 생기기도 했다. 이럴 경우 사안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상급 부서에서 겉돌기만 하여왔다. 사실 부처협의 회의에 나가보면 부처간의 팽팽한 부처이기주의와 보신주의를 실감하게 된다. 또 근본적으로 회의 스타일자체가 잘못되어 있다. 의논을 하고 조정을 하기 위해 모인다기 보다 주장을 하고 밀어붙이기 위해 오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처럼 정책입안과 조정 자체가 복잡한 나라도 없다. 연일 열리는회의는 정책조정을 위한 것이다. 과장급 회의에서 국장급,차관보급,차관급을 거쳐 장관급 회의까지 단계도 복잡하다. 경제부처들은 경제기획원의 타박을 받고,총리실의 눈치를 보고,청와대의 꾸지람을 듣게 마련이다. 조금 껄끄러운 사안이면 당정협의를 통해 당의 의견을 들어야 하고 감사원과도 협의해야 한다. 지붕위에 지붕이 겹겹으로 있다. 일본이나 미국 또는 거의 모든 선진국은 이같은 정책결정의 단계가 명료하다. 너무 단계가 복잡하고 조정부서가 많다는 것은 책임행정과 상치된다.책임소재가 분명치 않다. 되도록 책임을 피하려 하며 부처이기주의만 팽배한다. 어느 경우 장.차관이 소신을 갖고 입안한 것이 수없이 많은 협의과정을 거치다 보면 용두사미가 되거나 전혀 다란 안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고급관료로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는 싸움이 많다. 사움닭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부처협의에서 고집도 부리고 배짱도 부려서 이겨야 유능한 관료로 인정을 받는것이다. 그래서 고위직에는 황고집이니,김배짱이니,안팻대니 하는 별명들이 유행이다. 명예로운 것이 아닌데 훈장처럼 되어있다. 민주주의란 보다 다양한 의견과 서로간의 타협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닌가. 상당수의 관리들은 좋았던 옛날의 향수를 지금도 못버리고 있다. 당시의 사무관이면 지금 국장정도의 파워는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국장은 그만큼 작아져 있다. 장관도 소신행정을 펼수 없는 판국인데 국.과장이 어떻게 소신행정을 펴겠는가. 협의라기보다 부처이기주의의 싸움판 같은 회의에 시달리다 보면 소신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장관은 장관대로,국.과장은 국.과장 나름대로 긍지와 소신을 갖고 일할수 있는 풍토가 아쉽다. 지금까지 경제부처에서는 무소불위의 존재였던 경제기획원이 재정경제원으로 통폐합된 것은 앞으로 정책조정에 있어서 보다 힘을 아끼고 부처의 소신과 책임을 존중하기 위함일 것이다. 재정경제원이 경제기획원보다도 더 막강한 공룡이 되리라고 우려하고 있었는데,예산운용에 있어 상당부분의 재량권과 전용권한을 해당부처에 주겠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가령 사회간접자본에 있어서는 재정경제원의 간여를 줄이고,건설교통부가 전적인 책임을 지고 추진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 행정부에 정책조정 기능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소신행정의 틀이 부족한 것이다. 소신행정은 책임행정과 통한다. 소신을 갖고 추진한 일에 대해서는 분명히 책임을 져야한다. 잘못은 있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풍조는 행정구조의 결함이다. 부처이기주의나 복지부동의 틀을 깨는 방법은 바로 각부처가 소신을 갖고 일할수 있도록,그래서 책임행정의 틀이 잡히도록 하는 것이다. 행정개혁이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어야 할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