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그리운 곳 가려나 .. 원당마을의 새해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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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가 눈감기 전에 같이 처가에 한번 가보는게 마지막 소원이야"-.한반도 분단1번지 원당마을을 지켜온 남정철(73)할아버지의 새해 소망이다. "저 산등성이에만 올라서면 처가가 보일텐데".남할아버지가 손가락으로 가르킨 산등성이에는 국군초소가 있고 그 너머로는 남방한계선이 지나가고 있다. 남할아버지의 처가는 바로 산너머 인강마을이다. 광복과 함께 삼팔선이 그어지면서 가볼수가 없었다. "장인 장모는 돌아가셨겠지만 처남들은 살아 있을거야"남할아버지는 평생고생만 시켜온 할머니에게 마지막 선물로 친정나들이를 시켜주고 싶어했다. 남할아버지와 함께 원당마을에서 태어나 피난세월만 제외하고 한평생을 살아온 정운복(68)할아버지의 "그리운 땅"도 바로 눈앞에 있었다. "저 초소밑이 바로 우리 집터야.저기 소나무가 파랗게 보이는 그 옆 말이야.죽기전에 집터라도 한번 밝아봐야 할텐데..." 원당마을 사람들의 을해년새해 소망은 이처럼 가슴 뭉클하고 뜨겁다. 분단1번지는 한반도 분단의 역사가 붙여준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의 또다른 이름이다. 분단전에는 장단군에 속했으나 이제는 북녁땅이 돼버려 수복과 함께 연천군에 편입됐다. 북위 38 선상에 위치해 한반도에서는 유일하게 삼팔선과 휴전선이 두번에 걸쳐 마을을 가르며 지나간 아픔을 안고 있는 마을이다. 북위 38 선상 마을들의 대부분은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남이나 북으로 갈리게 됐지만 원당리만은 계속해서 분단선상에 남는 마을이 돼버렸다. 장단콩이 유명했고 임진강과 한강을 잇는 수로를 이용,마포와 고랑포간의 수상운송으로 서울 개성간 물물교역을 중개했던 원당마을입구에는 지금도 "개성 20km "라고 씌워진 이정표가 3백22번 지방국도 위에 세워져 있다. 지방 소도시치곤 꽤나 번창했던 원당리에 분단1번지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45년 10월 초순.미군과 소련군이 같이 나타나 지도를 펴들고 다니며 마을 여기저기에 말뚝을 박았고 소련군이 마을 어귀를 감아 돌아가는 사미천 다리 건너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출입을 통제하면서부터였다. 정할아버지는 "처음에는 그것이 삼팔선인지 남북이 갈리는 것인지도 몰랐다"며 "소련군 초소를 피해 인근 마을을 드나들었고 물물교환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삼팔선보다 휴전선이 더 아픈 분단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한국전쟁이 발발되면서 원당마을 사람들은 피난은 커녕 영문도 모른채 인공치하에 들어갔다. 동족상잔의 현장을 직접 겪은 원당마을 사람들이 처음으로 고향을 등지게 된 것은 1.4후퇴때.이로부터 11년 뒤에야 다시 고향땅을 밟을 수 있게 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았다. 전국 각지로 피난을 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원당마을 사람중 92세대가 62년 6월 전쟁 폐허가 돼버린 황량한 고향땅에 되돌아 왔다. 남할아버지는 "나무를 세우고 풀을 엮어 만든 움집에서 기거하며 배급식량으로 연명했지만 피난생활의 설움보다는 그래도 내 고향이 낫다는 생각으로 참고 살았다"고 말했다. 이제 원당마을은 총2백69가구로 늘어났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분단전부터 이 마을에 살았던 원주민들만이 촌노의 모습으로 마을을 지키고 있다. 혼자서 1만여평의 논농사를 짓고 있는 남할아버지는 "통일이 되면 원당마을이 다시 번창하겠지.그러면 도시로 간 젊은이들도 다시 돌아 올거야"라며 마을 젊은이들의 이농을 분단탓으로 돌렸다. 원당마을 사람들에게는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게 한가지 있다. 통일이 되면 누구보다 먼저 북녁땅에 달려 갈 수 있다는 희망이다. "고랑포국민학교 동창생들이 바로 저 너머에 살고 있어.통일이 되면 모두 만날 수 있겠지"정할아버지가 새해 첫날 꾸고 싶은 꿈이다. 광복50년,분단50년이 되는 돼지해를 맞는 원당마을 사람들의 통일소망은 이처럼 소박하면서 간절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