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미술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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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어느 부호가 많은 그림들을 사들였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심미안은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자연히 그림을 질로 따져 사모으기보다는 양으로 메울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 집에 초대된 손님들에게 제딴에 에술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그림들을 보여주는 것이 취미였다. 그러던 어느날 버너드 쇼를 비롯한 명사들을 초청해다 놓은 그는 그 그림들을 자랑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저는 이 그름들을 공공기관에 몽땅 기증하고 싶습니다. 이것들을 어떤 곳에 기증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 말을 들은 쇼는 "아, 좋은 곳이 있습니다.맹아학교에 기증하십시오"라고 응수했다. 경제적인 부는 있되 예술적인 심미안이 없는 수집가들을 비꼰 우스갯 소리다. 비록 그 부호가 남다른 심미안은 없다 하더라도 그림애호가 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간접적으로나마 촉발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볼때 예술이란 예술가 자신이 아닌 애호가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예술품이 예술가의 창작욕구를 충족시키는 것만으로 존재하게 된다면 그 존립의의는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한 속성을 두드러지게 지닌 것 중의 하나가 미술품이다. 미술품의 생산라인 예술가의 창작의욕과 미술품의 소비자인 해오가의 저변확대는 서로를 활성화 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어느 하나라도 없게될 때에는 예술의 꽃이 피어 날수 없다. 거기에 이들을 매개시켜주는 미술품상인의 역할 또한 중요한 존재다. 그런데 한국미술품시장에서는 이들 세주체의 관계가 왜곡되어 있는게 현실이다. 미술품은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경기변동과 수도공급이 가져다 주는 유통가치에 따라서 그 가격이 결정된다는 시장원리를 외면해 왔다는 사실이다. 미술품이 애호가에게 제공해 주는 즐거움과 쾌락 희열, 즉 미술품의 미적 질과 작가의 예술적 동급으로 그 가치를 평가하는 고전적 관념에 메달려 있었다는 말이다. 생산자들은 70년대 이래로 계속 치솟아 온 자신의 작품가격을 고수하다 보니 소비자들로 부터 소외를 당하고 또 거기에 경기하강등 여건변화에 따라서 작품거래가 침체되다 보니 생산자나 중개자에게 악순환이 겹쳐질 수 밖에 없다. 올 "미술의 해"에는 이러한 미술시장의 왜곡현상이 바로 잡혀 오랜 침체의 늪에서 탈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크다. 시장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비술품투자여건을 마련하라는 얘기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