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한담] 정보통신은 세계화의 인프라 .. 이우재 <1>

******************************************************************* 우리나라 통신발전상은 세계가 알아준다. 현재 전화시설이 2천만회선을 돌파,세계 8위 수준에 와있다. 이같은 덕택으로 멀티미디어,초고속정보통신망등 요즈음 시류를 타고 있는 분야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느정도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80년대 통신발전의 한 주역인 이우재 한국통신 초대사장(62). 그는 육사출신으로 별을 달았고 체신부장관과 국회의원경력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가장 자랑스러웠던 직함은 한국통신 초대사장이라고 말한다. 만 7년간의 사장시절에 그는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소비했다고 한다. 이사장을 만났다.******************************************************************* -요즘 한국PC통신 하이텔의 원로방모임에도 나가시는 등 컴퓨터를 쓰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사장=컴퓨터를 만져보니 안하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판은 모두 익히셨습니까. 이사장=모두 배웠어요. PC를 하나 가지고 있어요, 아주 구형이지만.주소록정리를 전에는 비서가 다 해줬는데 이젠 내가 합니다. 연하장을 3백장정도보내면 3,40장은 반려돼 와요. 주소변동이 많아 이를 정리 하려고 하니까 자판을 배워야 되겠더라구요. 국제친구들 주소정리를 하다보니까 영문자판도 만지게 됐구요. -컴퓨터로 글은 쓰지 않으십니까. 이사장=글을 써서 하이텔 원로방에 20회정도 냈었습니다. 전화이야기인데 요즘은 그만뒀어요. 젊은 사람도 많이 나오고 재미있게 쓰기가 상당히 힘들더군요. 그래도 원로방은 노인들이 하는거니까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PC통신에 들어가서 도와달라는 일 있으면 들어도 주고 부탁도 하고,상당히 활발하게움직여 도와줄 일은 없지만 뒤에서 지원은 해주고 있습니다. PC통신을 통해의견도 교환하고 젊은이에게는 얘기도 해주고 좋습니다. -회원간에 한달에 몇번씩 만나실 기회는 있습니까. 이사장=정해놓고 만나지는 않아요. 일년에 몇번씩 회의나 협의할 일이 있으면 나와서 조언 해달라고 할 때 만납니다. 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자원봉사자들인데 대부분 직장을 가지고 있어요. 신문사,잡지사기자도 있고 조그마한 회사 사장도 있습니다. -가지고 계시는 PC는 몇 비틉니까 이사장=16비트입니다. 그러나 글쓰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고도의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PC통신하는 데도 문제가 없고. -원로방 멤버가 몇명이나 되나요. 이사장=한 1천명정도 됩니다. 서울,부산,대구,광주,원주등 전국에 다 있습니다. 회선요금도 특별히 하이텔요금으로 시내전화요금을 받기 때문에 쌉니다. -미국에서는 혼자된 할머니,할아버지가 컴퓨터를 통해 뒤늦게 만나 같이 하는 경우가 있는 데 원로방에서는 그런 일은 없습니까. 이사장=아직은 한국적 정서때문인지 공식적으로 PC통신에 나와서 그렇게 된 경우는 없습니다. 다만 자기 일상생활 얘기,원로방회의중의 재미있었던 일,지나간 얘기등을 주로 합니다. 그래서인지 PC통신에 동우회가 많습니다. 동우회에서는 서로 편지가 왔다갔다 하고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는 흥분해서 별별 의견이 다 나왔어요. 시사성 얘기도 자주 나오고 매일 컴퓨터를 열어보면 모임이나 아는 사람 글도 보고 연락도 하고 아주 재미있습니다. -새로 사귄 친구들은 있습니까. 이사장=그런 친구는 아직 없어요. 원로방에서 적극적으로 일하시는 분들은 인사하고 지내는 정도입니다. -한번에 PC통신을 하시는 시간은 이사장=한번 열어보고 닫으면 10분정도. 글을 쓰고 답장도 써주면 30분정도 됩니다. -요금은 한달에 얼마나 나옵니까. 이사장=얼마 나오지 않아요. 이번에 전화를 한대 새로 놨습니다. 하이텔 단말기를 쓰다가 국제사격연맹에서 오는 연락을 받기 위해 팩시밀리겸용으로 놓았습니다. PC용과 팩시밀리용 회선을 묶었더니 참 편리해요. -옛날 한국통신사장으로 계실 때 1가구 1전화시대를 여셨는데 그때 10년후쯤 컴퓨터를 본인이 사용할 것으로 예상하셨나요. 이사장=그때는 컴퓨터라는 것은 생각을 못할 때입니다. 또한 집에 놓고 쓴다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내가 그만 둘 때부터 정보화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도 논의되기 시작했지요. 또한 이때부터 컴퓨터의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직에 있을 때는 단말기를 만질 생각도 못했고,현직을 떠나서는 무엇을 해야할까를 생각해 보니까 몇가지 기록(자서전을 쓸 생각은 없다)을 컴퓨터에 보관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나름대로 정보통신분야 일본 서적을 번역했었는 데 이를 기록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어 아들이 쓰던 단말기를 사용해 기록을 남기면서 자판을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원로방이 생겨 PC통신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전화이야기를 중심으로 주변의 이야기를 주요 내용으로 20회정도 썼는데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쓰신 글에서 전화에 대해 무엇을 쓰셨습니까. 이사장=내가 어렸을때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체신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당시 왜정시대에는 귀했던 자석식 전화기가 있었어요. 이후 내가 통신공사 사장이 되고 체신부장관까지 됐는데 이것이 선대부터 내려온 유물이고 정해진 운명처럼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렸을 때 전화사정이 어려웠던 얘기,전화로 인해 편리하게 지냈던 얘기,이런 것부터 썼습니다. 이후 군대에서 통신병으로복무했던 얘기,현대화가 돼가면서 가입자동화가 이루어졌던 얘기등을 썼습니다. 여기까지만 쓰고 말았어요. -선친께서 계시던 직장(체신부와 한국통신이 분리되기전의 체신부)의 최고책임자인 한국통신 초대사장에 임명됐을 때의 느낌은. 이사장=두려운감이 들었습니다.직책이 그릇에 비해서 너무 큰게 아닌가 먼저 걱정되더군요. 짐이 상당히 무거워 책임감이 크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당시 한국비료등이 국영기업체가 된 이후 부실해졌기 때문에 국영기업체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좋지 않았습니다. 내가 국민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고 정부에도 부담을 주는게 아닌가 걱정이 앞섰고 절대로 부실기업을 만들어서는 안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또한 종사자들이 한국통신에서 근무하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사장의 임무라고 생각했지요. > [ 대담=강영현 과학기술부장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