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은행, "검은돈 은닉처 오해받기 싫다"..정부의지 한몫

금융거래에 대한 철저한 비밀보장으로 유명한 스위스은행에 변화의 기미가 보이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스위스은행은 범죄로 벌어들인 돈이나 은밀한 정치자금등 소위 검은 돈을 세탁하는 역할까지 마다하지 않아 왔다. 스위스법률이 범죄행위로 벌어들인 돈을 규제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이 법율이 제 역할을 다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최근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부터의 금괴밀수사건이 처리되는 과정에서 스위스은행이 국제수사에 협조한 사실은 예금에 대한 비밀보장관행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93년 남아공 검찰은 요하네스버그공항에서 금괴밀수사건을 적발했다. 적발된 금괴밀수업자들은 금과 완환에 대한 남아공정부의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금을 해외로 밀반출했다. 이들은 금괴 표면에 은을 입혀서 세관을 통과해 스위스의 두 은행에 예치시켰다. 남아공검찰은 이들이 수년동안 밀수한 금괴가 수억달러처치에 달할 것으로 추정,절도 사기및 외환관리법 위반혐의로 수사에 착수했다. 남아공검찰은 붙잡힌 2명의 밀수업자의 증언을 토대로 나머지 공범 8명을 수하하면서 스위스검찰에 협조을 요청했다. 스위스가 타국의 수사에 협조하는 경우는 그 범죄행위가 자국 법률에도 어긋날때 뿐이다. 또한 외국의 검은 돈을 많이 예치받아 있는 스위스에서는 외환관리법 위반이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외국에 계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외환관리법 위반이 되는 엄격한 법률을 가진 남아공의 요청에 대해 스위스검찰이 협조에 응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더군다나 스위스은행이 계좌조사에 협조하는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기에 밀수업자들은 범죄행위를 완강히 부인했다. 그러나 매우 이례적으로 스위스검찰은 외환관리법 위반조항 대신 범죄행위로부터 나온 돈의 국내 에치금지조항을 적용해 지난해10월 이들 8명에 대한 영장을 청구했다. 이결과 두명이 남아공으로 도망쳤고 나머지는 이달에 있을 심리에 회부될 예정이다. 한편 남아공검찰도 이들의 죄목에서 외환관리법 위반을 삭제하고 절도및 사기죄만을 적용키로 결정했다. 만약 남아공이 외환관리법을 적용한다면 스위스가 다시 수사에 협조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스위스은행에는 상당수의 남아공인 비밀계좌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스위스와의 외교관계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사건만으로 스위스은행의 예금구좌에 대한 철저한 비밀보장 관행이 깨졌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스위스가 더이상 범죄자금의 은신처로 남지 않게 만들겠다는 스위스정부의 의지는 어느정도 확인된 셈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