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 (44) 제2부 진사은과 가우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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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진사은의 아내 봉씨의 몸종 교행이었다. 교행은 꽃밭을 돌보고 꽃들을 꺾고 하면서 자기를 훔쳐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다. 그래서 더욱 등을 돌리지 않고 허리도 펴지 않은채 일에 열심인척 하였다. 교행은 어릴적부터 봉씨의 몸종으로 들어와 봉씨가 진사은과 혼인하여 고소땅 창문이라는 곳으로 오게 되었을때 함께 딸려온 것이었다. 지금 진사은의 집은 창문성 밖 십리가라는 거리의 인청항 골목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옆에 허름한 절간이 하나 있었는데, 워낙 터가 좁은데다 후미진 골목 안에 있다 하여 사람들은 그 절을 호로묘라고 불렀다. 진사은은 자가 사은이요, 이름이 비로 그 자가 의미하는 대로 은둔의생활을 하고 있는 선비였다. 벼슬에는 처음부터 뜻이 없었고, 종일 꽃과 대나무를 가꾸거나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었다. 집안 살림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진사은의 인품을 존경해 마지않았다. 그래서 수시로 손님들이 찾아와 사은의 고견을 듣곤 하였다. 그런데 사은은 오십에 가까운 나이로 들어섰건만 영련이라는 어린 딸 이외에는 다른 자식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의 가정에서 일하고 있는 교행 역시 매사에 단정하고 기품 있게 행동하였다. 교행이 꽃을 다 꺾고 허리를 펴며 돌아섰을 때 주인의 서재 창문가에 서 있던 사람이 약간 옆으로 비껴 서는 것을 보았다. 헤진 두건을 머리에 쓰고 색이 바랜 옷을 입고 있어 무척 궁색해 보였다. 그런데 꼿꼿하게 편 허리, 떡 벌어진 어깨, 훤하게 넓은 얼굴, 굳게 다문 입술, 치켜올라간 눈썹, 부리부리한 눈, 오똑한 콧날, 불거져 나온 광대뼈들이 여간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 주인집에 저런 남루한 차림의 손님은 출입하지 않는데 저 사람은 누굴까. 옳거니, 저 늠름한 모습으로 보아 주인님이 종종 말하던 가우촌이란 분인가 보다. 주인님은 가우촌 저 분을 늘 도와주고 싶어하지만 형편상 제대로 도와줄 기회를 얻지 못하고 계시지. 그리고 주인님은 가우촌 저 분을 가리켜, 항상 가난하게 살 사람이 아니라 언젠가는 큰 인물이 될거라고 하시지" 교행은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걸음을 걷다 말고 두세번 우촌을 돌아다보았다. 교행이 돌아볼 적마다 우촌은 온몸이 찌릿찌릿해지는 기분이었다. "저 여자가 나에게 관심이 있는게 틀림없어. 아무튼 저 여자는 풍진에 묻힌 나같은 인물을 알아보는 눈이 있구먼"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