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인문과학과 우리의 삶..신숙원 <서강대교수>

요즘 우리의 삶속에 범람하는 "세계화"와 "현대화"라는 용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이들 용어가 초래한 뚜렷한 현상으로 "영어"와 "기술문명"에 대한 강도높은 관심을 들수 있다. 이러한 현상이 현실적으로 필요하다고 수긍하면서도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기술뿐이라는 광고나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어린아이를 내세워 영어 조기 교육을 강조하는 광고를 자주 접하면서 그리 신나는 느낌이 들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현상들이 부추기는 부정적인 측면들에 대한 염려로 걱정이 앞서게 된다. 개인적인 차원은 물론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국제어로서의 영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어회화 생활용어를 강조하면서 이들이 영어와는 별개의 것처럼 간주되고 영문학 과목이 영어를 배우는 일과는 무관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이는 요즘 대학평가에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는 대학가에서 일고있는 여러 움직임에서 쉽게 찾아 볼수 있다. 여러 대학에서는 국가시책의 일환으로 영어회화과목에 역점을 두고 급작스러운 변모를 꾀하고 있다. 영어가 모국어인 교수를 한꺼번에 대거 초빙해오고,국내교수에게와는 달리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는 일부터 시작하여,문학과목수를 줄이고,심지어는 셰익스피어과목을 위시하여 20세기 이전의 문학과목들은 이 시대와는 관계없는 쓸모없는 것으로 단정하여 교과과정에서 아예 빼버리는 경우도 있다. 또한 영문학과가 있는 학교에서 영어과를 새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 경우 4년 동안의 교과과정을 영어과목만으로 어떻게 다 채울 수 있을 것인가. 회화나 작문은 단어와 문장의 단순한 나열만으로 이루어 지지 않는다. 날씨 이야기나 그날 하루에 무엇을 했는지와 같은 피상적인 얘기만으로는 얼마나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그러한 대화가 얼마나 서로의 관심을 끌며 무엇인가 깊이있는 것을 나눌 수 있게 할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자명하다. 우리가 나누는 말은 현실적인 차원에서 필요한 사실적인 정보를 교환하며 의견을 나누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이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정치 경제적 문화적 예술적 철학적 종교적등의 환경과 자신의 삶의 관계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내용을 나누기를 갈망한다. 물리적 내용뿐만 아니라 지적 정서적 명성적 내용까지 담은 대화들이 서로를 얼마나 살찌게 하고 돈독한 나눔을 갖게하는지. 단순한 기능적 언어의 수준과 물리적 환경을 넘어서서 보다 깊이 서로의 삶을 나누고 보다 인간답게 살기위해서는 쓸모없어 보이는 인문과학분야-문학 철학 종교 사학 심리학등도 과학 기술 경제 경영분야못지않게 중요함을 강조하고 싶다. 명확하게 숫자로 환산해서 제시할수 있는 결과를 보여주지 못할 뿐만아니라 추상적이고 막연해서 말장난같이 여겨질때도 있는 인문과학분야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인간적 존엄성을 간직한채 행복하게 살아갈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학문이다. 이들 인문과학분야의 학문들이 비록 경영 과학 기술분야처럼 가시적인 결과를 빠른 시간안에 보여주지는 못할지라도 후자의 학문이 우리들 삶의 물리적 물질적 환경을 향상시키는 일에 기여한다면 인문과학은 이러한 환경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수 있는 지침이 되는 가치관을 모색하고 구축하는 일에 기여한다. 현대 기계문명사회가 안고있는 여러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또한 우리가 보다 인간답게 그리고 주체로 살아가기위해서 이제 그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가고 있는 인문과학분야에도 따뜻한 관심을 쏟고 시급하게 물과 양분을 주며 키워 나가야할 때라고 믿는다. 우리의 삶이 정신적인 풍요로움과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함께 누릴 때에만 우리는 주변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자신의 자유로움을 지킬수 있는 참되고 아름다운 삶을 창조해 나갈 여유를 가질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