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가사람들] (38) 사장론 <12>..무거운입이 송사장 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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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대리인은 거래소에서 주식의 매매주문을 처리하는 사람이다. 컴퓨터화가 진행되기전 그리고 청산거래가 주조를 이루던 시절에는 시장대리인이 증권인의 꽃으로도 불렸던 요직중의 요직이었다. 일부 증권회사는 사장이 시장대리인을 겸직했고 다른 증권회사들도 전무와 상무,낮아도 부장급에서 시장대리인을 했다. 송영균 한진증권 사장이나 김부길 신영증권 사장도 시장대리인 출신이다. 송사장은 부장 상무로 진급하면서 시장대리인 업무를 계속했고 사장이 되고서도 2년동안은 시장대리인을 했다. 당시 증권시장은 매수 매도양측이 세력을 다투는 이른바 책동전을 되풀이하던 때라 시장대리인은 작전의 승패를 짊어지고 있는 최전방 전투사단같은 임무도 띠고 있었다. 그래서 증권사 오너의 심복들만이 시장대리인을 할 수있었다. 시세가 급박하게 돌아갈 때엔 증권사 사장들이 직접 거래소 플로어에 나타나 매매를 진두지휘했다. 증권계의 대부로 불리는 강성진 전증권협회장이 삼보증권 사장시절 자기회사 시장대리인의 구두뒤축을 차대면서 매매를 지시했다는 얘기는 지금 원로들이 즐겨 회상하는 일중의 하나다. 강사장은 오른발 뒤축을 차면 "사자",왼발뒤축을 차면 "팔자"식으로 시장대리인의 등뒤에 붙어서서 매매지시를 했는데 시장이 격앙되면 무자비하게 구두뒤축을 차댔다. 그래서 삼보증권의 시장대리인은 아예 워커를 신고다녔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송사장은 이때쯤해서 시장대리인회 부회장을 했다. 그때문에 중앙정부에까지 끌려갔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72년 증금주를 놓고 일대 세력전이 벌어졌을 때 투자세력들이 격앙돼 매매가 일시 중단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특정세력과 관련된 고의적인 매매 중단이었는 지를 중정에서 조사받았다. "조사를 받던 중에 우연히 창문밖을 보니 최각규 당시 부총리가 마당으로 걸어나갑디다. 며칠후에야 부총리까지 중앙정보부에 끌려다닌다는 사실을 알게됐죠"라고 송사장은 당시를 회고하고있다. 날만 새면 거듭되는 책동전의 와중에서도 그는 철저한 비밀주의를 끝까지 지켜냈다. 비밀 엄수 덕분에 그는 매수측과 매도측으로부터 모두 우군이라는 오해(?)를 받았고 그래서 골고루 주문을 받았다. 어쩌면 그의 "무거운 입"이야말로 이토록 오랫동안 증권회사 사장을 할 수있도록 해주는 비결인지도 모를 일이다. 송사장은 부지런하고도 끈질긴 사람이다. 그가 한진증권으로 옮아온 이후 이회사를 공개시키라는 오너의 특명이 떨어졌다. 한진증권이 기업을 공개한 91년은 증시상황이 나빠 일체 기업공개가 불허되던 싯점. 현재 재경원 예산실을 맡고있는 이영탁씨가 당시 증권국장으로 있었다. 송사장은 이국장이 매일 아침 모헬스 클럽에 나간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꼬박 한달을 이곳에 출근했다. 풍채좋은 송사장은 뜨거운 욕탕속에서 비지땀을 흘려대며 한달동안이나 이국장을 닥달해댔다. 송사장은 여러가지 직함을 갖고있다. 협회 부회장을 했고 지금은 운영위원장으로 있다. 운영위원장은 협회의 살림을 챙기는 직분이어서 시시콜콜한 것까지 챙겨대는 그에겐 어울리는 자리다. 협회에서는 송사장과 대유증권의 배창모사장,대우증권의 김창희 사장 연영규 협회장을 4인방이라 부른다. 송사장이 안을 내면 배사장이 동의하고 김사장이 설명을 덧붙이면 연회장이 "그렇게 합시다"라고 결론을 낸다. 그만큼 송사장은 증권계의 실무에 밝다. 송사장이 한진증권에서는 무엇을 보여줄지도 관심거리다. 한진증권은 기업공개가 늦어 한진그룹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자기자본등이 소형사수준에 불과하다. 덩치가 적은 한진증권으로서는 이 풍채좋은 송사장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있음도 사실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