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가사람들] (53) 국제영업맨 <4>..선진화이끄는 주인공
입력
수정
80년대초 자본시장의 자유화가 처음 진행될때만해도 웃지못할 헤프닝들이 많았다. 의욕만 앞섰지 전문지식을 갖춘 인력이 전무했고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할지 그저 막막하기만했다. 해외증권발행에 관한 매뉴얼도 없었고 MBA등 유학출신도 증권사 국제부에서 쉽게 찾아볼수없었다. 그저 영어를 어느정도 구사할수 있으면 국제부에 보내는 시대였다. 한달에 두세건씩 해외증권을 발행하는 요즘과는 차원이 달랐으며 국제부가 천덕꾸러기로 받아들여지던 때였다. 84년 국제투신사(일종의 한국투자전용 컨트리펀드)인 코리아펀드(KF)를성공적으로 설립한 대우증권의 황건호이사는 지금 생각하면 코미디같은 일이 당시만해도 수없이 반복됐다고 회상한다. 우여곡절끝에 84년 4월 KF주간사(퍼스트보스톤사)를 정하고 한숨 돌리고있을때 미국측에서 19명의 비즈니스맨들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한국에서 제출한 사업계획서을 꼼꼼히 확인하기위한모임(Due-Diligence Meeting)을 갖기위해 내한한 변호사 회계사 실무자들이었다. 어엿한 사옥조차없이 지내던 명동시절때의 일이다. 마땅한 회의실도 없는 상황에서 큰손님 을 이주일동안 치러야했다. 할수없이 이태호회장방에 힐튼호텔에서 빌려온 붉은 탁자보를 깔고 회의장을 마련했다. 주눅이 들었지만 피할수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질문들은 시간을 달라며 일단 벗어나야했다. 이런 회의가 있는지조차 몰랐던만큼 준비가 있었을리 만무했다. 유일한 무기는 겁날게 없다는 베짱과 젊음뿐이었다고 황이사는 밝힌다. 주간사와 공동주간사간 상충되는 분야야 협상으로 문제를 풀수있지만 한국의경제환경에 대한 의심은 쉽게 해결할수없었다. 4백억달러규모의 외채,정부의 재정상태등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수성동에 있던 재무부와 한국은행 산업은행등을 들쑤시고 다니는데야 벌어진 입이 닫을수 못했다. 처음에는 자본자유화를 위한 정부프로젝트성격이 강한 만큼 한국정부에 보증을 요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때마다 별동대를 파견해 정부측과 호흡을 맞췄다. 박상은증보국장(현 리스협회회장) 강정호사무관(현 주미대사재무관)등이 미국측과의 협의내용을 귀뜸해주면 밤새워 보고서를 작성,제출하곤 했다. 그러면서 이런게 국제업무란걸 조금씩 깨닫게 됐다. 천신마고끝에 5월22일 KF창립총회를 갖긴 했지만 세일즈도 문제였다. 해외증권을 발행할때처럼 팔지못하면 떠안아야하는만큼 무조건 팔아야했다. 누구한테 어떻게 팔아야할지 제대로 모랐지만 미국측 투자관리회사인 스커더스티븐슨클락사의 조언을 받으면서 홍콩 유럽등지로 세일즈출장을 나갔다. 세일즈를 다녔던 대우증권 구자삼이사(당시 국제부 과장)는 외국과 국내주가를 객관적으로 비교할수있는 능력조차없는 상황에서 투자를 권유하자니 어려움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고 밝혔다. 오직 개인적인 인맥을 총동원,투자를 권유하는 수준이었다. 더욱이 외환관리법상 달러를 마음대로 가져갈수 없는 시절이어서 마음놓고 술한잔 사지 못하면서 외국금융가를 누벼야했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다. 가장 접근하기어려운 미국증권 발행시장에 진출해 공모발행과 뉴욕증권거래소상장을 이룬뒤에는 모든게일사천리로 풀려갔다. KF의 주가는 급등해 80년대후반 컨트리펀드설립붐을 일르켰고 한국기업들은 해외증권을 발행해 저리의 산업자금을 조달할수있게됐다. 실리와 명분을 내세우며 증권사의 젊은 국제부직원들이 2년동안 땀을 흘린 결과였다. 당시 차장 과장이던 황이사 구이사를 비롯 김성호대리(현재 리만브라더스부소장) 서부택대리(시티증권서울지점장)조은성씨(미국 미시간대연수중)최명렬씨(헝거리대우증권사장)등은 아직도 같은 분야에서 자본시장의 선진화를 위해 일하고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