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한담] 동물사랑에 정년퇴직은 없어 .. 김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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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공원 동물부장 김정만씨(61). 그는 한국인 최초의 동물원 사육사인 박영달옹에 이어 근대적인 정규대학에서 수의학을 전공하고 동물원 수의사로 공채된 첫번째 인물이다. 그는 1958년 창경원 동물원에서 첫 직장을 잡은후 이곳에서 외곬로 인생을살아오다 이제 오는 12월말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다. 말못하는 동물들에게 의술을 베풀면서 반평생을 고락을 함께하며 보고 느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대담 = 김대곤 ]]] -성장과정에서 동물전문가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된 어떤 배경이 있습니까. 김부장 =어릴적부터 동물에 대한 관심이 높았지요. 소년시절 지금의 동인천역 뒤에 저의 집이 있었는데, 집근처 야산에서 놀다가 개나 소의 배설물이 묻어도 더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아프면 병원에서 치료받지만 동물들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고 사람이 고쳐주지 않으면 죽지않을까 하는 걱정과 애처로움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있었습니다. -졸업후 첫 직장은 어디였습니까. 김부장 =1958년 4월 서울대농대수의학과를 졸업한후 농림부 가축위생연구소와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의 공채시험에 응시했지요. 모두 합격이 되었지만 스스럼없이 구황실재산사무총국으로 결심, 6월12일부로 근무하게 됐습니다. 구체적 업무는 바로 창경원동물원 수의사였고 동물과 직접 접촉하는 일이어서 기대감이 컸습니다. 이후 여태까지 다니고 있는 평생직장이 되었습니다. -황실에서 동물원을 관리하게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김부장 =있죠.일본은 조선의 마지막황제 순종의 왕권을 뺏고난후 그 한을 위무하기 위해 동.식물이나 보며 세월을 보내라는 뜻에서 황실부속으로식물원과 동물원을 지어준 것이지요. 그러나 일본의 보다 깊은 속셈은 조선의 선비정신의 맥을 끊으려는 무서운민족정기말살정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동물원앞의 저수지는 예부터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던 곳이었는데 일본은이곳의 잔디밭을 파내고 물로 가득채워버린 것입니다.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킨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수 있겠군요. 김부장 =그런면도 있지만 순종황제의 국민사랑에 대한 애틋한 숨은 의미도 있습니다. 순종황제께서는 자신은 비록 왕권을 행사할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자신을 위해 짓는다는 동물원을 온국민과 함께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궁중법도에 의하면 왕궁은 일반 백성의 출입이 제한을 받게 되므로 "궁"의 격을 낮춰 "원"으로 칭하게 하는 한편 궁궐의 담을 허물어 국민들의 출입을 자유롭게 해줬던 것입니다. 이는 국민들과 비공식적인 접촉이라도 해보고 싶은 몰락해가는 왕의 애절한 심경의 발로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1907년에 착공하여 2년후인 1909년11월1일 창경원 동물원이 개원하게 된 것이지요. -창경원 동물원을 과천의 서울대공원으로 옮길때 규모가 너무 크다느니 서울에서 멀리 있어 서울시민이 찾아가기 힘들다는 소리도 있었지요. 김부장 =지금사 이야기지만 서울대공원의 동물원이 크게 된데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1978년에 우리는 당초 8만3천평규모의 나름대로 큰 동물원을 지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요. 그러나 먼 장래를 봐서 더 커야 된다는게 저의 생각이었지요. 그래서 어떤 경로를 통해 청와대에 건의를 했지요. 그리고 북한은 1959년에 평양 대성동에 동독의 하겐베르크동물원 전문가를초청해 72만평규모의 대규모 동물원을 만들었다는 것을 귀띔해 주었지요. 그랬더니 계획규모를 당장 확대하는 것은 물론 북한 것보다 더 크게 하라는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덕택에 북한보다 약16만평이 더넓은 88만평규모의 동물원이 건립될수 있었고 서울대공원전체는 2백45만여평으로 커졌죠. 이를두고 일부에선 규모가 너무 크다는 불평을 했던 모양입니다만 국민들의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위해 매우 유용한 장소로 활용할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도시민들에겐 많이 걷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구나 요즘은 삼림욕할수 있는 숲과 걷다가 쉴수 있는 벤치도 있어 휴식처로서도 그만입니다. 그리고 자녀들과 올때는 동물원구경을 한다는 생각보다 동물의 세계를 공부한다는 기분으로 미리미리 자녀들과 함께 공부도 하고, 하룻만에 끝내기보다 여러날을 쪼개서 보려는 여유와 정성이 필요합니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동물사랑교육을 해야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김부장 =93년 한수 이북에 발생하던 유행성출혈열이 남쪽에서도 발생해전국 확산을 크게 우려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보신용에 좋다며 뱀을 마구 잡아버렸기 때문이지요. 유행성출혈열을 옮기는 숙주인 등줄무늬 흰쥐를 잡아 먹는 뱀이 없어짐으로써 먹이사슬의 체계가 흔들린 탓에 빚어진 일입니다. 특히 9~10월에 월동을 하기위해 뱀들이 이 들쥐사냥에 나서는데 이때 뱀을잡는 것은 금물입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보기 싫고 쓸모없는 것 같지만 자연생태계는 서로 조화하고 의지해 살도록 만들어진 것이므로 동.식물이나 자연생태계를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됩니다. 개인소득수준이 2천달러미만일 때는 인간의 힘이 모자라 자연을 방치하다가어느정도 자본축적이 되면 개발이란 미명하에 자연을 파괴하게 됩니다. 그러나 1만~1만5천달러에 이르면 인간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생태계를 유지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동물원생활에서 잊혀지지 않는 고충이나 애로사항은 없었습니까. 김부장 =지난76년 11월1일 오후3시45분께의 사건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수 있습니다. 서모씨(목수)가 술을 잔뜩 마시고와 호랑이굴에서 철책사이로 고기를 넣어주다 오른쪽 팔뚝이 물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근처 매점에 있던 할머니의 제안으로 신문지를 말아 불을 붙여 얼굴에 갖다대도 수염만 그을렸을뿐 호랑이는 서씨의 팔뚝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케이블카의 기름걸레에 불을 붙여 호랑이 얼굴에 들이밀어 간신히 입을 벌리게 했지만 이미 팔뚝은 떨어지고 없었지요. 급히 인근 서울대병원에 옮겼습니다. 잠시후 신문기자들이 들이닥치고.. 그런데 서씨는 그때까지 술이 덜깬 상태에서 사진기자를 폭행하면서 난동을부렸습니다. 그래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죠. 사건도 문제인데 기자까지 폭행하게 됐으니 사직할 각오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신문에서는 본인의 관리소홀 문책보다 서씨의 음주폭행사실에 초점을 맞춰 기사화하는 바람에 상부에서 더이상의 문책을 하지 않아 다행히 해직위기는 넘겼지요. 그후 서씨가 일생을 보장하라며 취직을 시켜달라고 떼를써 고민하던 끝에 호랑이우리 경비원을 시켜주겠다고 했더니 그후론 한번도 나타나지 않더군요. -올 연말 정년퇴임하신후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김부장 =이달부터 공로연수제도의 덕택으로 서울대공원엔 1주일에 한두번만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9월초부터 충북대학교에서 야생동물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후진양성에 주력할 작정입니다. -후학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김부장 =20대 졸업후 10년은 앞뒤 가리지 말고 자신의 역량을 키우기위해 배움에 힘쓰도록 하고, 이후 10년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기 위해열심히 일을 하며, 이후 10년은 후배를 지도해 스스로 물러날 준비를 해야합니다. 그리고 난후 10년간은 자신이 배운 학식이나 지식을 신문 방송 잡지등의 대중매체등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고 난후 덤으로 더 사는 10년이후는 자라나는 새싹들을 위해 사회교육과 봉사활동에 이바지해야 된다는 자세를 가져 주었으면 좋겠군요. -경제계나 정부에도 하고 싶은 말씀이 많을텐데요. 김부장 =우리의 후손을 위해 무언가 유익한 것을 남길수 있는 사회교육장을 마련해 주었으면 합니다. 예를들면 예술의 전당이나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등 한분야에서만 외곬 인생을 살아오며 터득한 값진 인생경험과 지식을 퇴직후에 특별히 출강해 가르칠수 있는 봉사단체나 교육재단등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례는 스미소니언박물관 대영박물관등에서 이미 시도하고 있고 그 후원자들은 대기업들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뜻있는 기업들이 나서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