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칼럼] 왕자기풍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두달 전쯤 총무처장관이라는 고위직에 있던 정계의 중진인사가 전임 대통령 중의 한사람이 4천억원이라는 엄청난 고액의 비밀자금을 가차명으로숨겨놓고 있다는 사실을 언론사에 흘려서 한동안 소란스러웠었으나 무슨 까닭인지 그것이 잘못된 풍문이었다는 식으로 흐지부지 사안이 종결되는 듯하였다. 그런데 지난달 중순경 돌연 야당 국회의원인 그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며그 전임 대통령이라는 이가 바로 현직 대통령을 후계자로 지명했던 제6공화국 대통령 노태우씨라고 공표하고 나섰다. 이로부터 매일 각 언론기관들이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내용들은 차라리 눈을가리고 귀를 막고 싶을 정도의 추악한 것들 뿐이었다. 드디어 노태우씨 본인의 "대통령 재임시에 5천억 통치자금을 모집하였다"라는 생경한 용어로 된 대국민사과성명이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되고 들끓는여론에 밀려서 노씨는 검찰청에 나가서 밤샘조사를 받는 참담한 수모를 겪게되었다. 조사과정에서조차 노씨는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인물답게 당당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국민들은 더더욱 실망하였고, 그의 숨겨놓은 재산이 그가 말한 5천억 비자금 뿐만 아니라 국내외에 각종형태로 은닉되어 수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추측성 소문이 날개를 달기 시작하였다. 이제 검찰은 이 소문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노씨 주변 인물들과 그들에게돈을 주었을 재벌 총수들을 불러 조사하기 시작했다 한다. 비록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최고 통치자의 지위에 있었고 그것도 직접선거라는 민주방식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치고는참으로 졸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이 시대 이나라 백성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민망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최고 통치자라면 왕자다운 금도와 기풍이 있어야 한다. 기원전 326년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를 침공하였을 때 최후까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에 맞서 싸우다가 세부족하여 아홉번이나 창에 찔린 끝에 포로가 되었던 파라바 왕국의 포로스왕이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에게 하였다는 말이 생각난다. "너를 어떻게 대해주랴"라는 질문에 "왕으로 대접해라"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만고 영웅 알렉산더를 감동시켰었다던 이런 왕자다운 태도가 새삼 부러워 진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