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강택민

10년전 한여름 상해에서는 어느 교향악단의 연주회가 열리고 있었다. 베토벤의 "운명"이 한창 연주되고 있을때 지휘자가 갑자기 쓰러졌다. 연주는 중단되고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걸어나가 지휘대에 선 그는 지휘봉을 들어 연주를 계속했다. 박수갈채속에 연주를 끝내고 돌아선 그를 보고 청중들은 놀랐다. 그가 상해시장 강택민이었기 때문이다. 강택민은 등소평처럼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온 인물이 아니다. 40여년동안 기술.행정관료로 일해온 그에게서는 정치적 제스처나 융통성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지 않는 과묵속에서 풍기는 그의 지적인 면모와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대중적 언행을 보면 그가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임을 알게 된다. 강택민은 1926년7월 호반의 도시로 유명한 강소성 양주근교의 한적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조부인 강석계는 학식이 높은 한의사였는데 강택민은 어릴때 6촌 숙부인 강상청의 양자가 된다. 신4군의 위생부장직을 맡았다가 43년 전사한 양부의 행적으로 "혁명열사의 유자녀"가 된 그는 고교때부터 상해에 보내져 교육을 받는다. 상해교통대학에서 전기학을 전공한 그는 46년 대학내의 비밀공산당조직에 가입해 공산주의자의 길로 들어섰다. 사료공장의 엔지니어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그의 이름이 중앙정치무대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80년대초였다. 뒤이어 상해시장을 거쳐 89년 등소평의 발탁으로 당총서기가 됐고 93년 12억인구의 최고통치자인 국가주석에 올랐다. "원칙성이 강한 보기 드문 지식인"이라고 등소평이 극찬했다는 그는 상해시장이 되기전까지 상해 보타구에 있는 작은 집에서 30년을 살았을 만큼 관리로서 청렴했다. 부인 왕야평과의 사이에 두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이 어렸을때 교육상 좋지 않다고 관용차를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우게 하고 걸어다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제가"를 잘 한 탓에 "치국"까지 하게된 경우가 아닌가 싶다.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이 오늘 우리나라를 방문한다. "국민들이여 잘 살아보자"(인민부기래)를 외치며 자본주의의 장점을 받아들이면서도 "우물물은 강물을 침범할수 없다"(정수불범하수)고 "중국식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그의 방한이 그의 말대로 한중우호확대와 평화안정에 기여하는 뜻깊은 여정이 되기를 기대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