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장목비이

중국의 관자는 책을 "장목비이"라고 불렀다. 옛 일과 먼곳의 일은 책을 통해서만 알수 있다는 것을 "긴눈 나르는 귀"로상징화시킨 별칭이다. 한국의 고서가운데 일찌기 "장목비이"의 역할을 해낸 책들이 많지만 "계원필경"이나 "동의보감"처럼 외국의 사서에까지 실리거나 외국에서 발간된 예는 흔치않다. "계원필경"은 신라말의 학자이며 문장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고운 최치원의 문집으로 "신당서"문예지에까지 책이름이 실려있는 국제적 저술이다. 고운은 857년 경주 6두품출신인 고일의 아들로 태어나 당에 유학, 그곳에서18세때 과거에 합격한 사비유학생이었다. 선주표수현 를 지내고 879년 황소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장군인 고병의관역수관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으면서부터 문명을 천하에 떨쳤다. 그는 그 공적으로 도총수관에 임명되고 황제에게 자금어대를 하사 받기도했다. "계원필경"은 그가 29세때 고국에 돌아와 그이듬해인 886년 당의 진중에서고려을 위해 대필한 공문서등과 시60편을 묶어 신라의 정강왕에게 올린문집이다. 특히 "계원필경"에 실려있는 "시황소격문"은 황소가 이 격문을 보다가자기도 모르게 침상에서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전할만큼 명문이었다고 한다. 고려의 문호 이규보는 ""당서"열전에 최치원의 전기가 들어있지 않은것은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일것"이라고 고운의 문재를 극찬했고, 조선의 명문장 서거정은 "계원필경"을 "동방예원의 본시"라고 규정했다. 후대의 실학자 이덕무 같은이는 "중국에서도 유행이 한물간 문체를 모방한아류에 불과하다"는 혹평도 했지만 당시에는 고운만한 문장가가 중국에도별로 없었다니 그의 혹평은 넉두리에 불과하다. 한편 1613년 허준이 지은 "동의보감"은 수 당이래 명초까지 그리고 한국고대의 고전의방서들이 망라된 동의학의 보고로 한국에서 출간된 뒤에 청나라와 일본에서 여러번 번각되고 최근에도 상해 대만등지에서 영인된 고전의서다. 한국을 방문한 중국의 강택민주석이 국회연설에서 "계원필경"과 "동의보감"을 예로들어 과거 한중양국의 문화교류사를 강조했다. 당시인 왕발의 " 왕각서"를 읊조리며 외국정상과의 대화의 폭을 넓힐만큼전통문화에 조예가 깊다는 강주석이 한국의 고전까지 알고 있는것을 보면책은 역시 "장목비이"인 것이 틀림없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