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부처 이창호, 실력과 인기 반비례 .. 올해 MVP 불구

한국 바둑텔레비젼 (B-TV)이 최근 실시한 인기투표 결과 조훈현 31%,유창혁 25%, 서봉수 19%, 이창호 18%로 이창호 칠단이 사인방중 꼴찌를 차지했다. 또 이창호 칠단은 지난 15일 91년이후 4년만에 올해의 최우수기사에 선정됐다. 91년부터 다승과 승률1위 타이틀을 한번도 놓치지 않는 발군의 실력을 보였지만 상복이 없었는지 계속 쓴잔을 마셨다. 92년은 서봉수 구단의 응씨배 결승진출에, 93년은 유창혁 육단의 후지쯔배 우승에, 지난해는 조훈현 구단의 세계대회 그랜드슬램 달성에 눈물을 삼켜야 했다. 이창호 칠단은 일본에서 현대바둑을 도입했다는 한국바둑의 원초적컴플렉스를 해소하며 한국바둑을 주변에서 중심으로 이동시킨 장본인이다. 세계최강 한국바둑계에서 수년째 정상을 지켜오고 있다. 천하의 조훈현도 이창호 앞에서는 날이 무뎌지니 "천상의 이창호"라 부를 만도 하다. 그런데 팬들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자만이 살아남는 프로의 세계에서 최고실력자가 최고인기를 얻지 못하는 것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전문가들이 꼽는 이유는 우선 "기풍이 재미없다"는 것. 이기긴 하지만 감상하기에 좋은 바둑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웃 일본도 비슷하다. 조치훈, 고바야시 고이치가 오랫동안 정상에 머물렀지만 인기 정상은 다케미야 마사키, 후지사와 슈코가 차지했다. 둘째는 "약자에 대한 응원". 조훈현-서봉수 라이벌시대에도 조훈현 구단의 승률이 훨씬 좋았지만 인기 만큼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열을 가릴수 없었다. 셋째는 조훈현 서봉수에 대한 "올드팬들의 향수". 비교적 중년인 바둑팬들이 조-서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계속 응원한다는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지만 승부사에게는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볼때 어딘지 미흡하다. 한 바둑인의 해석은 이렇다. "바둑이 프로에게는 승부지만 많은 아마추어에게는 아직도 낭만이다. 인생의 희비를 바둑에 담아보려는 마음이 있다. 그런면에서 이창호는 4인방의 다른 기사들에 미치지 못하는지 모른다" 조훈현의 그 화려한 감각, 유창혁의 직선적인 강렬함, 서봉수의 들풀같은 비장미에 견줄때 이창호는 늘 이기지만 덜 감동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먼 외계에서 뿐만 아니라 세포하나에서도 우주의 비밀이 탐구되듯 이창호의 반집에 감춰진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최근 이창호 칠단은 기풍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초반부터 흔들어 승부를 결정짓는 경우가 많아졌다. "새로운 시도를 하고싶다"는 것이 이칠단의 말이다. 내년이면 이창호 칠단은 입단 10년째를 맞는다. 그가 단순한 승부사에 불과한지,쉽게 잴수 없는 깊은골을 지녔는지 시간이 좀더 지나면 뚜렷해질 것이다. 아직까지는 반집의 불가사의에 접근하는 만큼 자신은 불가사의를 더하기만 하고 있다. 바둑인들은 "이창호에게 이기는 것도 힘들지만 말을 시키는 것은 더 힘들다"고 우스개로 말한다. 이칠단이 다른 사람의 입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바둑을 말하는 날이 오면 그의 키는 발들고 손들어도 쉽게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