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인터뷰]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에게 듣는다

한진그룹이 올해를 재도약 원년으로 선포했다. 지난해의 창업 제50주년을 계기로 올해부터는 육.해.공 종합수송기업으로서명실상부한 최상의 인류, 물류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다짐이다. 그 첫번째 결실이 2월1일부터 나타나게 됐다. 대한항공이 국내선 요금을 5% 인하키로 한 것이다. 장바구니물가가 치솟고 있는 마당에 교통요금을 낮춰 고객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겠다는게 그 이유다. 조중훈 한진그룹회장은 요금 인하에 대해 "27년동안 KAL을 키워준 국민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조회장의 이 답변은 그의 지론이자 한진의 모토인 "수송보국"을 금새 떠올리게 한다. 이제는 고객에게 "보은"해서 기업의 사회적인 이미지를 드높이는 길을 택하겠다는 경영철학을 엿볼 수 있다. "수송외길"을 고집한 이유에 대해서 조회장은 "내가 아는 범위에서 최선을다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자신의 범위안에 들어온 사업을 세계 일류 수준으로 키워놓은 조회장(76)을한국경제신문 문중식 편집국국장대우가 만나봤다.======================================================================= -대한항공이 2월부터 국내선 전노선의 요금을 5% 인하키로 한데 대해 관심이 대단합니다. 어떻게 이런 쉽지 않은 결정을 하셨습니까. 조회장 =국민들이 27년동안 KAL을 아껴준데 대해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5%는 지난해 50주년을 맞이한 한진그룹의 역사와 같은 숫자를 맞춘 것입니다. 사실 이번 결정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물가때문에 자극을 받은 것입니다. 나는 두부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얼마전 두부 한모를 사달라고 시켰습니다. 우린 두 식구라 한 모를 사오면 되는데 글쎄 두부를 사온 사람이 "몇일 전에 한모에 1천원하던 두부값이 지금은 1천3백원하더라"는 거예요. 정말 놀랐습니다. 물가가 하루아침 사이에 3할씩이나 오른 것입니다. 선거가 다가오면 장바구니 물가가 오르기 마련이지만 이 정도인지 몰랐습니다. 경제가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서 요금을 내리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대한항공이 지난해 사상 유례없는 흑자를 낸 것도 한가지 이유로 작용한 것 아니겠습니까. 조회장 =창사이래 저원가 정책을 펴온 것이 결국 결실을 맺은 것 같습니다. 최근 항공업계의 상황을 보면 국제선 요금은 계속 내려가는 추세입니다. 앞으로 매년 1~2%씩 인하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기도 합니다. 항공업계에서는 요금이 자율화되고 있다는 얘기지요. 대한항공은 나름대로 시설투자와 항공기도입등을 시기적절하게 시행해왔습니다. 때문에 안정적인 경영기조가 정착돼 영업이 잘 됐습니다. 여기에다 외부적인 요인으로 유가안정과 환차익, 국민들의 해외여행 붐등이 플러스로 작용했습니다. 가격 자율화라는 측면에서 볼때는 항공 특히 국제선부문이 가장 먼저 개방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디리규레이션 폴리시"라고 해서 카터 행정부때부터 항공요금 자율화와 노선자유화 항공청폐지등의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왔습니다. -항공부문이 가장 먼저 규제를 완화해 나간 대표적인 업종으로 꼽히고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해도 이번 요금인하는 커다란 파급을 몰고 오지 않을까요. 조회장 =대한항공이 이번에 요금을 인하하게된 저력은 지난 27년동안 노하우를 축적한 데서 나오기도 했지만 그만큼 튼튼한 자금을 비축해 놓았기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교통요금을 내렸다는 것은 교통요금파괴이자 곧 유통가격파괴로 이어지는 일대 혁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내선항공요금은 지난 87년 유가가 대폭 내렸을때 한번 내린 적이 있을 뿐이지요. 어쨌든 이번 요금인하는 규제에 얽매여있던 관주도형 요금체계에서 탈피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일로 기록될 것입니다. 이번 일로 정부의 저물가정책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거대한 항공기회사를 경영하다보면 복잡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닐 텐데요. 조종사확보문제는 어떻습니까. 제주비행훈련원에서는 충분한 인력이 배출되고 있나요. 조회장 =어렵지요. 제주 비행훈련원에서는 매년 40~50명씩의 부조종사급 요원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부조종사는 한번 교육하는데 2년씩 걸립니다. 게다가 조종사까지 되는데 몇년씩 숙련기간이 필요하므로 조종사급에서 부족현상이 생기는 겁니다. 인력난을 극복키 위해서는 기반 시설을 늘리고 있지요. 최근에는 A300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대형활주로를 훈령원비행장에 개장하기도 했습니다. -남북간 항로개설에 관심이 있으신지요. 북한을 방문한다든지 남북간 신규항로를 개설하실 구상은 없으십니까. 조회장 =대북한 사업은 정부차원에서 해야지요. 민간차원에서는 아직 왈가왈부할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현재로서는 남북항로개설 계획은 없습니다. 다만 사업성 차원에서 살펴본다면 서울~평양노선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거리가 자동차로도 능히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가깝기 때문입니다. 다만 청진이나 요즘 경제특구로 하겠다고 하는 나진 선봉지역정도라면 문제가 다릅니다. 비행장 시설만 갖춘다면 신의주도 괜찮겠지요. -평소에 늘 "창업주에겐 2선이란 없다"는 말씀을 해오셨잖습니까.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지요. 조회장 =나는 지금 2선으로 물러나 있습니다. 중요한 사업에 다소 참여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업이란 언제 어디서나 잊어버릴 수 없다고 느껴요. 수십년간 해온 사업인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잊어버릴수가 있겠습니까. 갑자기 하루아침에 습관을 바꾼다면 내자신이 가엾어질 것입니다. -평생을 변함없이 수송외길만을 걸어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조회장 =내가 아는 범위안에서 꾸준히 사업을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특별한 공부나 전문분야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단 조선분야에는 기본적인 교육을 받았었고 이를 사업에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었던 것이지요. 어느 분야에서나 기초를 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커다란 무기가 되는 법입니다. 전쟁에 나가려면 총 정도는 알아야할 것 아니겠습니까. -엔진 돌아가는 소리만 듣고도 어디가 탈이 났는지 금방 알아맞춘다면서요. 또 선박의 내부설계까지 지시할 정도로 기계에 훤하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조선소에서 일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조회장 =20대초반에 일본에 가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일본의 조선소에서 견습공으로 일했지요. 당시 30원을 받으면서 작업복 세탁같은 궂은 일도 도맡아 했습니다. 작업복 세탁은 내가 아주 잘합니다. 그렇게 20대 전후에 공부한 것이 기계요, 배였습니다. 인간은 거짓말을 할 때가 있어도 기계는 거짓말을 안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한진해운이 지금 운용하고 있는 컨테이너선을 건조할 때 일화가 있습니다. 배의 철판두께를 종전의 25mm에서 17mm로 줄인 결과 짐과 속력 원료등 3가지면에서 엄청난 이득을 보았습니다. 배의 무게가 가벼워져 더 많은 짐을 싣고 더 작은기름으로 더 빨리 운항할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덕택으로 한진해운은 오일 쇼크를 이겨내고 세계 컨테이너 수송시장을주도하는 오늘날의 대형선사로 발전한 것입니다. 이처럼 기계를 잘 이해하면 배나 비행기나 다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원가절감을 할 수 있습니다. -세계 어디서나 대한항공을 비롯한 한진그룹의 명성은 대단합니다. 중국과의 관계도 아주 특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서울~북경간 항로는 조회장의 이름을 딴 C.H.CHO라인으로 불리고 있나요. 조회장 =그렇습니다. 그 내력은 이렇지요. 아시안게임 직전 한중간 부정기 항로를 개설하면서 내가 직접 지도위에서 항로를 그어 보았습니다. 항로개설을 위해 당시 홍콩을 거쳐 중국에 직접 들어가 답사를 마쳤지요. 결국 북경에서 출발해 천진 대련을 거쳐 북한쪽을 피하기 위해 서해상을 남하해 인천 서울쪽으로 들어오는 코스가 탄생한 것입니다. 아마 이 노선이 C.H.CHO라인이라고 앞으로도 계속 불린다면 내가 로얄티를받아야 할 겁니다. -한일수교당시 다나카수상을 움직였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다나카 전수상과는 본래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습니까. 조회장 =그래요. 다나카씨는 수상이 되기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원래 내게는 오사노 겐지라고,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연장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다나까수상을 키워낸 인물이지요. 내가 겐지와 친한 사이이다보니 셋이서 곧잘 어울렸습니다. 아무일 없을 때도 어울려 술을 자주 마셨지요. 나이는 내가 가장 어렸고 겐지가 최연장자였는데 셋은 모두 학벌이 국졸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수교되기 1년전인 64년 당시 다나카대장성장관을 찾아가 차관을 얻어왔습니다. 쌀 30만톤을 들여와 농림부에 넘겼고 현금차관 2천만달러도 들여왔습니다. 2천만달러는 당시 어마어마한 액수였지요. 한국의 총가용외화가 고작 체이스맨하탄은행에 있던 4천7백만달러였으니까요. 차관에 직접 나서게 된 계기는 당시 장기영부총리의 부탁 때문이었습니다. 부탁을 받고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여를 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일을 한 것입니다. -프랑스와의 인연도 깊으시지요. 에어버스기 도입을 계기로 한불민간경협위원장도 맡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조회장 =한 20년이상 프랑스와 민간외교를 하다보니 웬만한 고위층인사들은 거의 다 알고 지내는 편이지요. 불어는 잘 못합니다. -돈을 아주 많이 벌으셨잖습니까. 가장 보람있게 사용한 곳은 어디라고 기억하십니까. 조회장 =무엇보다 내 돈을 들여 KAL 한진해운같은 훌륭한 기업들을 키웠다는 것이 보람이라면 보람이지요. 벌었다해도 모두 내 돈은 아니지요. 인생이란 결국 "엠티 핸드(빈 손)"가 아니겠습니까. -아마 한국에서 해외여행을 가장 많이 한 사람중 한 분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잦은 해외여행과 격무에 임하면서도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으시면. 조회장 =술을 마시고 잠을 푹 잡니다. 요즘은 4시간정도 수면을 취할 수 있는 신경안정제를 챙겨 먹지요. 아무리 긴 비행기여행이라도 4시간정도 잘 수 있다면 시차적응등에 아무 문제가 없지요. 건강이 가장 큰 자산이 아니겠습니까.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