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한의와 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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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술이 한국인에게 신뢰를 얻게 된 것은 1884년의 일이다. 그해 10월 갑신정변으로 금위대장 민영익이 우정국 개국 만찬자리에서 자객에게 중상을 입었다. 때마침 동석했던 묄렌도르프가 그를 자기 공관으로 데려가 미국인 의사 알렌에게 응급왕진을 청해 치료하도록 했다. 사경을 헤매던 그가 3개월만에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자 사람들은 양의술을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는 신술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서울에 온지 20일밖에 안됐던 알렌이 곧 왕립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할수 있었던 것도 이 일이 계기가 됐다. 중국의 고대의학이 한국에 전해진 것은 고조선이후 한사군시대부터 였다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그뒤 중국에서 온 의서의 이론들은 거의 그대로 전습돼 오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야 독자적인 의약학이 수립된다. 세종때 집성된 향약집성방 에는 우리나라 궁중이나 민간에서 널리 쓰이던 경험처방 1만706방과 침, 뜸법 1,476가지가 실려 있다. 또 세종때는 중국의서 153종과 인도의 불교의서까지 섭렵해 병 증세별로 분류한 "의방류취"가 편찬됐다. 80개 부문으로 분류되고 총1만여 항목에 달하는 방대한 의서다. 허준이 완성시킨 "동의보감"은 한국인의 체질과 실정에 맞는 처방과 민간에서 통용되는 치료법, 한국의 약재까지 수록한 민족의학서 이다. 특히 조선말에 서양보다 앞서 체질병리학의 체제를 천명한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한의학의 정화로 꼽힌다. 한의학은 1900년을 전후해 일본의 말살정책과 새로운 서양의학의 유입으로 점차 쇠퇴의 길을 걷다가 근래에 와서야 새롭게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2명을 뽑는 96학년도 경희대 한의학과 편입시험에 163명이나 되는 지원자가 몰려들었다는 소식이다. 그중에는 현직 의대교수를 포함한 의사 19명이 응시했고 소위 명문대졸업생 56명도 끼여있다고 한다. 사후치료에 중점을 두는 양의학보다 예방으로 근원적인 치료가 가능하다든가 규격화된 화학약품으로는 치료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의사출신 응시생들의 한의학과 지원 이유이고 보면 발전만을 거듭하는 듯한 양의학의 한계를 실감하게 된다. 일찍이 한의학과 양의학을 접합시켜 "중의학"의 꿈을 실현시킨 중국의예처럼 한의 양의의 통합연구가 이루어져 한국의학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화젯거리로 삼을 이야기만은 아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