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부실보도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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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보도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질주하는 수레의 바퀴와 더벅 더벅 걷는 사람의 발이 길을 차지하려고 오랜동안 싸움을 벌여 오다가 어느때에 와선가 타협의 선이 그어진 산물이보도라는 추정이 있을 뿐이다. 기원후 78년8월 베수베오화산의 대폭발로 매몰되었다가 16세기 이후의 발굴로 그 모습이 일부 드러난 폼페이에 가 보면 그 속속을 뒷받침해 주는증거를 확인할수 있다. 화산이 폭발하기 이전엔 항만도시였던 품페이는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이자제정로마시대초기의 귀족 휴양지로서 번화한 곳이었다. 그러한 도시답게 수레와 사람이 다니는 길이 확연히 구별되어 있다. 수레의 바퀴자국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는 차도와 그보다 한단 높게차로 양쪽으로 만들어 놓은 보도다. 자연석을 울퉁불퉁하게 깔아 놓은 길들이지만 수천년이 지났는데도 끄덕없다. 고대의 로마시대에도 황제들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때 마다 아름답게 대리석으로 모자이크한 포장보도를 확장해 천임황제와 어깨를 겨루었다. 그 덕택으로 시신들은 군사의 울부짖음과 수레바퀴의 시끄러움을 피해한적하게 걸어다닐수 있었다. 그러한 고대사회의 포장보도가 사라진지 여러 세기가 지난 1765년에야 연석(차도와 보도의 경계석)으로 경계를 지은 세계 최초의 포장보도가 런던의 웨스트신스터구역에 등장했다. 그 이후 대도시은 물론 번화한 도시의 차도 양쪽에 설치되는 보도는 필수적인 중요시설이 되었다. 때마침 서울의 한 시민단체가 시 감사자문위에 부실보도공사를 감사해달라는 첫 청구를 했다. 되돌아 보건데 해마다 사시사철 시내 곳곳에서 보도를 뜯어 고치는 공사가없는 날이 없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부실공사가 지금의 문제만은아닌 것 같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멀쩡한 보도포장재를 걷어낸 뒤 새로 공사를 하느라하면 어떤 해에는 공사를 연말에 집중적으로 벌이는 경우였다. 그 회계연도에 책정된 예산의 불용액을 줄이기위한 편법이라는 후문도 있었지만 "당국과 업자가 결탁한 공사"라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선진국의 어느 대도시를 가보더라도 서울처럼 보도포장공사가 자주 벌어지는 곳은 없다. 시당국은 이번 기회에 철저한 감사를 벌여 예산낭비의 소지를 차단하고 남은 예산을 환경이나 복지의 개선등에 전용하는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할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