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이순지

이순지(1406~1465)는 조선조 초기의 문신이자 천문학자요 수학자다. 이천 장영실과 더불어 세종조의 과학기술을 개화시킨 주역이다. 그는 원래 문신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동궁의 행자로 벼슬길에 들어섰다가 1427년(세종9) 문과에 급제한 뒤 숭문원(뒷날의 홍문관)교리 승정원좌부승지 판한성부사등을 거쳐 임종하던 해(세조11)에는 판중추원사라는 높은 직위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또한 그는 효심이 남달랐던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은 1437년(세종19)어머니 상중에 관직이 내려졌을 때 올린 상소문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상소문에서 충과 효의 갈림길에 처한 자신의 고뇌를 언급한 뒤 관직에 나아갈수 없음을 어머니와의 깊은 정을 들어 간청했다. "신이 태어날 때부터 병이 많아 다섯살 때까지도 아직 말을 하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여 항상 포대기에 뉘였었는데 어미가 고생스럽게 품에 안고업으시며 유모에게 맡기지 아니하였고 몸소 친히 길러서 지금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의 고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뛰어난 재능을 아끼던 세종은 3년동안의 시묘를 하도록 버려두질 않았다. 그는 세종의 예견대로 과학자로서 우뚝한 업적을 남겨놓았다. 왕의 명으로 산법(수학)과 역법(천문학)을 연구한 끝에 천문관측기 등 많은 과학기계를 만들고 천문학서를 저술하는데 크게 일조를 했다. 그는 이천 장영실과 함께 천문의상을 교정 제작하고 천체관측기인 간상, 태양의 그림자 관측기인 규표, 해시계, 물시계 등을 만들었다. 또한 그는 정인직 정초 정흠지 김담과 더불어 "칠정산내외편"이라는 역서를 써서 조선의 역법을 완성시켰다. 그뒤 김담과 함께 역법을 계산하는 실무에도 종사하기도 했다. 1445년에는 그때까지 조사 정리된 모든 천문관계 문헌과 이론을 체계화하여 "제가역상집"을 펴낸데 이어 1457년에는 세종때 정리된 일월식계산법을 쉽게 편찬하라는 세조의 명에 의해 금석제와 함께 그 법칙을 외우기 쉽게 산법가시와 사용법을 덧붙여 "교식추보법"을 완성시켰다. 정부는 3월을 "이순지의 달"로 정하고 그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는 각종 기념행사를 갖기로 했다. 수학이나 천문학이 잡학이라고 비하되었던 조선시대의 문신이 뚜렷한 족적을 남기게 된 것은 현군의 선견지명이 큰 견인력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