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키와 지구력

한국에는 "고추가 작아도 맵다"는 격언이 있다. 키가 작다고 업신여기지 말라거나 키가 작은 사람이 오히려 더 똘똘하고 빈틈이 없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격언이다. 역사를 되돌아 보더라도 키가 작은 사람이 그 격언처럼 위대한 족적을 남긴 경우가 적지않았다. 프랑스혁명의 이상을 온 유럽에 전파시켰던 나폴레옹 보다파르드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파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60km를 가면 퐁텐블로 마을이 있고 그곳에는 소베르사유궁이라고 불리는 궁성이 있다. 아담한 침대가 놓여 있다. 유럽을 제패했던 그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어린이용처럼 너무나 짧막한 침대라서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수 없게 된다. 신장 135cm의 단구를 눕혔던 침대였으니 그럴수밖에 없다. 나폴레옹의 단신에 얽힌 일화로는 이런 것도 있다. 장군으로서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된뒤 어느날 그가 의자위에 올라서서 책장에 꽂힌 책을 꺼내려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한 장군이 "죄송합니다만 제가 폐하보다 키가 훨씬 크니까"라면서 다가섰다. 그러자 그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그대가 나보다 큰 것은 아닐세. 등이 조금 높을 뿐이지"라는 조크 섞인 말로 그 장군의 호의를 물리쳤다. 나폴레옹은 그의 조크에 베어있는 것과 같은 잠재된 신체적 열등의식을 그의 위대성으로 승화시켰는지도 모른다. 한국 역사에도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다섯번이나 지내면서훌륭한 업적을 남긴 오리 이원익이라는 단구의 정승이 있었다. 키가 작아 키작은 재상으로 널리 불렸다는 기록이 전해질 뿐이어서 그의 키가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나폴레옹 못지 않게 단신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키가 작은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똘똘하고 빈틈이 없는 성격을 가졌다고 단정할수는 없다. 다만 키가 작은 사람이 키가 큰 사람보다 확률면에서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뜻일뿐이다. 최근 발표된 국민체력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 3년동안에 국민의 키와 몸무게등 평균체력조건은 좋아진 반면에 지구력은 나빠졌다. 지구력은 체력의 소산임은 물론이나 정신력과도 관련된 것임을 부인할수 없다. 그렇다면 이 조사결과는 "작은 고추"로 상징되어 온 한민족의 특징이 사라져 가는 조짐이라고 생각해 볼수도 있다. 식생활의 서양화는 영국 속담의 "키다리 바보" 양산을 예고해 주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