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일터로] (5) 제1부 : 멀고 험한 길 - 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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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B전자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이정현씨(26.가명)는 요즘 회사 일에 슬슬 재미를 붙이고 있다. 대학때의 전공(신문방송학)을 살릴수 있는 홍보기획부서에 배치를 받은데다업무도 점차 손에 익어가기 때문. 무엇보다 흡족한 것은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지 않는 이 회사의 승진체계다. 그럴수록 그녀는 10개월전 어려운 결단을 내려 직장을 옮기기를 백번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사실 이 곳이 두번째 직장이다. 식품회사 계열의 광고회사에서 6개월 가량 근무하다가 다시 이 회사에 입사한 것. 그녀가 광고회사를 그만둔 이유는 다른게 아니다. 같은 부서에 근무하던 선배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대리였던 그 선배 여사원은 올해 나이 38세의 미혼여성. 입사 10년만인 35세때 "대리"를 달았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남자의 경우 3년만에 자동적으로 대리로 올라갈수 있는데 반해 여자는 6년후, 그것도 승격시험을 거쳐야만 대리로 올라갈 수 있는 부당한 "승진체계"의 피해자였다. "입사 동기가 과장이 되고 차장이 되는데 나는 이제 겨우 대리"라고 말하는 선배의 모습에 그녀는 회사를 계속 다닐 용기가 사라지고 말았다. 대졸여성들의 취업문이 과거에 비해 많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다. 채용인원 자체가 늘었을 뿐 아니라 노골적으로 여성을 차별할수 없게끔 제도자체가 변화하고 있어서다. 그러나 조직내 승진이나 승격 등 인사관리로 들어가면 얘기는 달라진다. 여전히 "바늘구멍"이요 "하늘의 별따기"다. 기업내 여성관리자의 수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지난해말 현재 국내 30대그룹에 속해 있는 여성임원은 모두 14명. 그나마 그룹 소유주의 친.인척으로 "원래부터" 임원인 여성을 제외하면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과장급 이상 여성간부를 따져 봐도 마찬가지다. 전체 사무직 간부사원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취업정보 전문업체인 (주)인턴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9월 현재 국내 40대 그룹의 과장급 이상 여성은 전체 간부 8만1,069명중 851명으로 1.05%를기록했다. 이처럼 여성들의 승진이 힘든 이유는 무얼까. 우선 제도적인 불평등을 들수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국내 337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남녀간 임금이나 승진체계에 차이가 없다는 사업체는 103개로 전체의 30.6%에 불과했다. 나머지 69.4%는 "어떤 형태로든 남녀간 차별을 두고 있다"고 답했다. 이중 직급차이만 두는 경우가 6.9% 호봉차이만 두는 경우가 35%직급 호봉 모두 차이를 두는 경우가 24.6%로 각각 나타났다. 여사원만을 대상으로 한 별도의 직급체계를 갖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전체의 26.4%에 해당하는 91개 사업체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는 물론 "아니다"라고 응답한 73.6%에 비해서는 낮은 비중이다. 그러나 명백히 남녀고용평등법을 위반하고 있는 기업이 전체의 4분의 1을 넘는다는 점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알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기업내 분위기다. 여성을 승진시킨다는 것은 곧 관리자로 육성한다는 뜻이다. 여성 과장 밑에 남자 대리도 있을 수 있고 여성임원은 남자부장을 거느려야한다. 그러나 아직 국내 기업은 이같은 분위기나 문화에 익숙지 않다. 무엇보다 남자 사원들의 반발이 심하다. 인사담당자로선 여성관리자를 선뜻 배출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한국보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한 미국의 예에서도 이같은 점은 확인될수있다. 뉴욕의 전문 조사기관인 "캐털리스트"가 최근 미국내 500대기업 부사장급 이상의 여성경영인 1,251명을 면접조사한 결과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응답자중 77%(복수응답)는 여성이 진급하기 위해선 지속적으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고 답했다. 자신들의 성공은 밤늦게까지 집에서 팩스를 받고 새벽 4시에 일어나 서류작업을 한 결과라는 것이다. 상사나 동료 등 남성경영인들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도록 개인적인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는 대답도 61%나 됐다. 세번째로 많은 대답(50%)은 어려운 일을 "골라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도력이 있어야 한다고 답한 여성은 37%에 머물렀다. 반면 500대기업 남성경영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지도력"이 최고 승진요건으로 꼽혔다. 제도적인 불평등이 없더라도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뭔가 "다른" 또는 훨씬 "뛰어난" 능력을 요구받고 있다는 뜻이다. 더구나 술자리 상담등 "한국적 문화"가 일반화되어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여성들의 설자리는 더욱 좁아질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선 "문화적으로 용인되는 만큼" 승진해야 여성들이 겪는좌절이 적다는 얘기도 있다. 여성 간부사원들이 성취욕때문에 미혼을 고집하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가정생활을 "제쳐두기" 일쑤인 것은 이 때문이다. 정당하게 자신의 능력을 평가받길 원하는 것은 모든 직장인들의 바람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같은 바람이 무너진다면, 아니 바라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여성 개인의 불행을 넘어 조직전체의 손실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