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시론] 4.11선택과 한국의 개혁..표학길 <서울대 교수>

표학길 지금부터 꼭 9년전인 87년 12월의 대통령선거에서 민정당의 노태우후보는 양김단일 후보실패로 불과 36.6%의 지지를 얻고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지난번 비자금파동으로 일부가 공개되기도 하였지만 당시 민정당은 막대한 선거자금을 사용하고도 근소한 차이로 집권당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만일 양김단일후보가 성사되었거나 선거자금에 대한 어느 정도의 규제가 실시되었다면 사실상 패배한 대선이었던 것이다. 곧 이어 치뤄진 88년의 제13대 4.26총선에서는 이를 확인이라도 하는 듯이민정당은 거의 같은 지지율밖에 얻지 못하였다. 그 결과 얻어진 여소야대로 정국은 끝없이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도 총선결과는 철저한 지역분할이었으며 일노삼김의 산물이었다. 이제 오늘 치뤄지는 제15대 4.11총선은 여러모로 제13대 총선의 상황에 비교되어 왔다. 무엇보다 지역기반에 바탕을 둔 삼김구도가 되풀이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여소야대의 가능성을 점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에 치뤄지는 제15대 총선이 13대 총선과 다른 몇가지 측면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13대 총선결과 창출된 여소야대의 정국은 또다른 권위주의 정부로 출범하는노태우 정권에 대한 국민의 경종이었다. 즉 문민정부를 탄생시키지 못했던 국민들의 실망이 응집되어 민정당을 소수정당으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제13대 총선이 대통령선거후 5개월만에 치뤄진 총선인데 반해 이번 15대 총선은 김영삼대통령 취임후 3년만에 치뤄지는 선거라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따라서 야당에서는 이번 총선을 현정권에 대한 중간평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민은 지난 3년간에 이루어진 "무엇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를 하여야 하는가? 최근까지 실시된 여론조사에 의하면 선거가 바로 목전에 다가왔는데도 부동표는 아직도 50%를 넘는다고 한다. 60%이상의 유권자가 마음에 드는 후보자를 고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투표를 포기하지 않고 투표소에 나가는 많은 유권자들은 싫으나 좋으나 정당을 기준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투표소로 향하는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특정정당의 당원도 아니며 특정정당이 내세우고 있는 정책.정강을 식별하지 못한채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지난 3년간에 이루어진 국정전반에 걸친 개혁을 평가하고 향후 4년동안 민의를 반영시켜 국정에 참여할 우리의 대표들을 선택해야 할 시점에 와있다. 또 그러한 선택이 비록 "최선의 선택"이 아닌 "차선의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개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를 여는 시점에서 국가운명을 좌우할 선량들을 뽑아야 하는 것이다. 지난 3년간 김대통령의 주도로 이루어진 국정전반에 걸친 개혁은 한마디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강도높은 개혁조치들이 시행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정치개혁입법, 금융실명제 및 군인사개혁등의 굵직한 개혁조치들중 일부는제도의 개혁이었으며 일부는 잘못된 관행에 대한 개혁이었다. 대통령 자신이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천명한 것은 잘못된 관행을 혁신하겠다는 의지를 공언한 것이다. 그렇게 천명할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정치행정개혁도 불가능할 정도로 위로부터의 먹이사슬의 구조가 우리 주위에 이미 깊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먼저 개혁의 성공과 좌절을 경험하였던 많은 선진국의 언론과 학자들은 김대통령의 개혁조치들을 "혁명이 아닌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 수행할수 있는 최대한의 개혁일 것이라고 평가해왔다. 이제 한국의 개혁이 우여곡적을 겪는 가운데 그나마 성공적인 개혁으로 정착할 것이냐, 아니면 참담한 좌절로 끝나버릴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던간에 이미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개혁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동감을 하면서도 일부에서는 김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이나 개혁추진 자세가 너무 독선적이라고 비난해왔다. 또다른 일부에서는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사건이나 5.18문제에 따른 전대통령의 구속을 김대통령의 정치보복이라고 비난해왔다. 많은 시민들은 최근에 터진 장학로사건을 보고 이제 김대통령의 개혁도 무너져내리는 것이 아닌가하고 한숨을 쉬고 있다. 그러나 지난 30년동안 누적되어왔던 권위주의 체제하에서의 정치.사회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왜곡과 비리구조를 김대통령 한사람이 뜯어고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왜 우리들 모두는 "밑으로부터의 개혁"에 따르는 자기희생을 두려워하면서 개혁이 어느 하늘나라에서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가? 일부에서는 이미 선거자금이 상한선을 넘어선지 오래이기 때문에 정치자금법은 없어야 한다고 한다. 또다른 일부에서는 금융실명제로 살기가 어려워 졌으니 그것도 없애야된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마치 고속도로에서 차선위반 차량들이 많으니까 차선을 전부 없애자는 주장과 같다. 이제 우리는 5공화국이나 6공화국의 상황으로 돌아갈수 없는 루비콘강을 건넜다. 역사는 언제나 보수와 개혁의 싸움이었으며 개혁의 성공은 소수의 자기희생에 의해서만 가능했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희생이 다수의 동참을 이끌어낼 때 작은 개혁이라도 현실로 자리잡을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우리는 공안정국에서 희생된 수많은 젊은이들의 넋이 헛되지 않게, 그리고 가나마 어렵게 시작된 우리들의 개혁이 좌절되지 않게소중한 한표를 던져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