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판소리의 세계화 .. 성창순 <국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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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무대를 수없이 가졌지만 91년 11월30일 뉴욕 카네기홀에서 두시간동안 심청가와 춘향가를 공연했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90% 이상이 외국 사람들로 가득찬 객석을 보고 나는 한국인도 알아듣기 힘든 판소리 가사를 이들이 얼마나 이해할까 하고 걱정했다. 그러나 차츰 분위기가 무르익고 감동섞인 박수가 터져나오는 것을 보며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마침내 발림(제스처)을 과감하게 하면서 심청가를 완창했을때 관객과 나의 호흡은 완전히 일치됐다. 2부 춘향가 공연이 끝나는 순간 원더풀을 연발하며 기립박수를 보내는그들을 보면서 일생동안 고생하며 판소리를 지켜온 보람을 느꼈다. 더욱이 이튿날 뉴욕타임스등 현지 언론들이 "신비의 소리, 한국의 판소리"라고 극찬한 것을 보고는 국악인으로서 뿌듯한 마음을 감출수 없었다. 귀국길의 비행기속에서 나는 판소리야말로 세계 어느 나라의 음악보다 뛰어난 예술이라고 되새겼다. 70년대부터 유럽 일본 미국 호주 등으로 수많은 판소리공연을 다니면서 틈만 나면 외국의 음악무대를 돌아봤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판소리가 외국음악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에 관해서도 수없이 검토했다. 그래서 우리 판소리는 어느 민족의 성악보다 값진 예술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러나 김포공항에 내리는 순간이면 늘 차디찬 환멸과 비애를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왜 이렇게 훌륭한 예술이 발상지인 우리나라에서 환영받지 못할까,외국인이 감탄하고 찬사를 보내는 판소리가 한국에선 왜 외면당할까. 어깨의 힘이 저절로 빠졌다. 45년은 우리민족에게 더없이 뜻깊은 광복의 해였지만, 동시에 우리의 옛것을 많이 잃어버린 뼈아픈 해이기도 했다. 더욱이 6.25와 함께 물밀듯 밀려온 외래문화를 접하면서 우리는 전통문화를보잘것 없는 유물로 간주해버렸다. 그 결과 외래문화의 홍수가 온 나라를 휩쓸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 우리 청소년들은 몸은 한국인이면서 의식구조는 국적잃은 세대가 돼버렸다. 21세기를 이끌어갈 우리 청소년들이 세계화란 과제속에서 배워야할 것들은너무나 많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길줄 아는 자기발견이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200여 나라가 공존하지만 우리처럼 유구한 역사와 전통문화를 자랑하는 나라는 흔치 않다. 그래서 조국의 미래를 담당할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아름답게 가꾸도록 교육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눈을 국제무대로 돌려보자. 휴전선으로 허리가 잘리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자원도 풍부하지 않다. 반면 무역전쟁은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게다가 외국상품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기술개발투자 등에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데 이를 조달하기도 쉽지 않다. 냉엄한 국제질서속에서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벽은 많다. 따라서 미래 고부가가치산업인 문화산업을 육성하려는 정부의 정책의지와 투자확대가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국내에서 홀대받는 국악이 세계무대에서는 갈채를 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할필요가 있다. 일본은 유도와 바둑, 다도를 30여년간 키우고 국제무대에 알려 오늘날 세계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경제대국 일본이 그냥 만들어진게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큰 돈 안들이고 세계에 내놓을 만한 문화상품을 개발하는 것이 우리의 예술과 민족혼을 지구촌에 펼치는 길이다. 세계화를 향해 가는 지금, 우리의 전통음악인 판소리가 오대양 육대주로 퍼져나갈때 민족의 자존심이 바로 서고 국가의 미래도 환히 밝아올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