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원작/임권택 감독 '축제', 영화/소설 동시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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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윤달마다 하루 세군데 절을 돌며 부적을 모았다. 죽을 때 관속에 넣고 가면 자식들에게 좋다는 믿음때문이다. 치매를 앓으면서 날마다 키가 작아지는 할머니. 평생을 나눠주기만 하다가 마침내 빈 몸으로 갔다. 복사꽃 사이로 날아가는 배추흰나비 한마리. 봄 언덕에 아름다운 상여 하나 떠간다. 이청준 원작 임권택 감독의 "축제" (태흥영화사)가 영화.소설작업에 동시 착수된지 1년여만에 완성됐다. 16일 첫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이 작품은 우리사회에서 갈수록 퇴색되고 있는 효의 의미와 중요성을 부각시킴으로써 한국극영화의 소재영역을 대폭 확장시켰다. 소설은 20일께 출간된다. 영화는 치매로 세상을 떠난 팔순 노모의 장례식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유명작가인 아들 준섭 (안성기)은 갑작스런 부음에 정신이 없는데다 13년전 가출한 이복조카 용순 (오정해)의 출현으로 혼란스럽다. 용순은 어릴 때 이복형제들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을 사랑해준 할머니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한편으로 출세해서도 어머니를 모시지 않은 삼촌 준섭에게 적의를 품고 있다. 두사람의 갈등과 문상객들의 소란속에 준섭의 동화책이 출간된다. 그 속에는 나이를 나눠주고 차츰 줄어들어 마침내 "소멸"되는 할머니의 사랑이 손녀의 눈을 통해 따뜻하게 채색돼 있다. 상여가 떠난 뒤 혼자 동화를 본 용순은 그제사 준섭의 아픔을 이해하고 장례식의 "축제"에 동참한다. 이야기는 장례식 과정과 동화속 이미지, 준섭의 자아인식 등 3가지가 겹쳐져 이뤄진다. 상례를 다룬 현실적 리얼리즘과 작가가 쓴 동화의 세계, 이를 통괄하는 준섭의 내면의식이 맞물려 진행된다. 밑바탕에는 생의 좌표를 잃은 현대인의 "효"에 대한 되새김이 깔려 있다.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교차되며 앞세대인 할머니와 지금의 나,뒷세대인 손녀를 묶어준다. 준섭과 용순사이에는 동시대인의 갈등이 숨겨져 있다. 상주의 내면을 상징하는 방안과 외부세계인 들판의 풍경을 대비시킨 화면구성은 이같은 "의식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아쟁과 피리를 이용한 김수철의 국악선율도 주제와 잘맞아 떨어진다. 작가 이청준씨는 "촬영현장에서 느낀 것과 전혀 다른 분위기"라면서 "기술시사회에 이어 3번째 보는데 처음엔 감독이 너무 절제한 게 아닌가싶어 아쉬웠지만 배면에 깔린 의미와 맛이 볼수록 살아난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