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김명국의 달

중국 명대의 화풍은 절파와 오파로 대별된다. 절파의 시조인 대진이 절강성 전당, 오파의 시조인 심주가 강소성 오현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붙여졌다. 이들 유파의 연원은 송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대의 천자가 화원을 설치하여 회화의 제작 감상 수집이 성행했다. 전대로부터 계승된 사실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이 화원을 지배했다. 그 경향을 원화체라고 불렀다. 대상을 정확히 묘사하다 보니 딱딱한 느낌의 그림이 되었다. 직업화가들이 주류를 이루는 북종화의 시발이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원화체의 권위주의에 반발하여 사실보다는 정신의 고양을 이상으로 하여 부드러운 필치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재야의 문인화풍이 생겨났다. 이른바 남종화이다. 화원은 원대에 해체되었다가 명대에 부활되면서 북종화풍을 잇는 절파를형성하게 되었다. 절파는 송대의 원화체 화풍에 조방한 수묵화풍을 접목시켰다. 그 필묵은 웅건하다 할수 있으나 때로 표현과잉이 되어 부산스럽고 딱딱한것이 되기도 했다. 남종화풍의 맥을 이어받은 오파로부터 광태사학, 광태파라고 격렬하게 비판을 받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한 절파화풍은 명나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상남폄북론(남종화를 숭상하고 북종화를 천시함)에 부딪쳐 세력이 급속히 쇠퇴했다. 당시 절파의 수장격인 남영마적도 남종화풍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 절파화풍이 한반도에 들어와 꽃을 활짝 피운 것은 조선조 중기인 인조~효종때 활약한 연담 김명국(1600~?)에 의해서였다. 그는 직인적 기능에만 머물지 않고 자신의 개성과 감정을 자유분방하게 필치에 투영함으로써 절파화풍의 독자적 경지를 개척했다. 그의 독창성은 굳세고 몹시 거친 필치와 흑백 대비가 심한 묵법, 호방하게 가해진 법, 날카롭게 각이 진 윤곽선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산수화에서 찾아진다. 조선중기를 풍미했던 절파화풍이 그를 정점으로 쇠퇴해 버렸지만 그는한국회화사상 가장 거칠고 호방한 필법을 구사했던 화가였다. 연담은 도화서의 화원으로 교수를 지냈고 1636년과 43년 두차례에 걸쳐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화명을 떨쳤는가 하면 1647년 창경궁 중수공사 때 책임화원으로 일했다. 그런데도 그의 명성은 일반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김명국의 달"인 5월을 맞아 그의 족적이 제대로 평가받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