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경기 어디로...] (상) 사라진 윈텔파워

"반도체 산업은 정말 벼랑끝에 몰렸는가" "1메가당 1달러"선이 무너지면서 산업계에 이같은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없어서 못판다던" 반도체가 이제는 팔수록 손해가 나는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게 아니냐는 것.한마디로 반도체의 호시절이 마감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사실 반도체 경기는 올초부터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였다. 작년 12월만해도 개당 52달러씩 하던 16메가D램 값이 두달 후인 올 2월에 26달러선으로 주저앉으면서 부터다. 급격한 가격하락으로 급속히 퍼졌던 "반도체 위기론"은 지난 4월 16메가D램 값이 33달러선으로 회복되면서 "일과성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16메가D램 값은 이달초 20달러 밑으로 다시 떨어졌다. 최근에는 하락세에 가속도가 붙으며 손익분기점 마저 무너졌다. 반도체의 출하액 대비 수주액의 비율인 BB율도 올초부터 지속적으로 떨어져 지난달엔 0.78로 사상최저치를 기록했다. 반도체 가격의 마지노선 붕괴와 BB율의 추락은 업계에 "설마"했던 반도체 위기론이 드디어 "현실"로 나타났다는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것은 단순히 반도체 값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는 점만이 아니다. 가격하락이 구조적으로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데 더 큰 고민이 있다. "수요처인 PC시장이 특별히 나빠지지 않았는 데도 반도체 값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이것은 바로 반도체 시장이 공급과잉이라는 구조적인 문제에 부딪쳤다는 것을 뜻한다"(김치락 반도체 산업협회 부회장)는 것. 공급과잉은 한국과 일본의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이 지난해부터 16메가D램을 경쟁적으로 증설한데 따른 결과다. "4메가D램의 초호황세가 16메가D램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한 각 업체들이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한 탓"(삼성전자 관계자)이다. 반도체의 공급과잉은 다른 제품의 경우와는 의미가 다르다. 반도체 산업은 원래 한꺼번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 단기간에 이익을 올리는 게 특징이다. 짧은 기간동안 돈을 벌려면 대량 생산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공급과잉이 일고 있다고 하더라도 각 업체들이 생산물량을 줄일 수는 없다. 반도체 업계는 가격 하락에 따른 매출 보전을 위해 생산량을 오히려 더 늘리게 된다. 결국 공급과잉과 가격하락이 악순환되면서 시장 전체가 바닥을 기게 된다는 것. 또 다른 문제는 메모리 반도체의 주수요처인 PC시장의 동향이다. 그동안 메모리 반도체의 초호황세를 이끌어 왔던 신제품 출시붐이 주춤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PC는 지난 몇년사이에 386에서 486 펜티엄급으로 기종이 급속히 발전했다. 기종이 발전할수록 메모리 용량이 커지면서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급속히 늘었다. 그러나 펜티엄급 이후에는 새로운 기종의 PC가 아직 선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메모리반도체의 수요를 대폭 확대시킬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새로운 컴퓨터 운영체계인 "윈도 95"도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한마디로 메모리 반도체의 호경기를 견인하던 "윈텔파워"가 올들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세계 반도체 산업은 "과잉생산과 신수요 창출의 부진이라는 두 가지 악재를 동시에 만난 것"(김부회장)이다. 문제는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 마련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솔직히 말해서 뾰족한 수가 없다. 상황이 반전될 때 까지 오래 버티는 게 유일한 대책이라면 대책이다"(삼성전자 C이사). 버틸 수 있는 방법은 유통물량을 줄이는 것이지만 이 경우에도 재고로 인해 고통받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나 이같은 위기가 장기화되리라고 보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멀티미디어 기기가 본격 양산되는 내년부터는 회복세를 보일 것"(전자산업진흥회 이상원 부회장)이란 게 일치된 견해다. 단기간의 어려움을 잘 넘기면 다시 멀티미디어라는 황금시장을 타고 좋은 시절을 누릴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다. 그러나 이번 반도체 가격 급락은 "국내업체들이 그동안 배두드리며 장사하던 안이한 자세를 바로잡는 계기가 돼야 한다"(LG반도체 K이사)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비메모리등의 기술개발을 서둘러 시장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술적 위기대처 능력"을 확보해야 세계 1위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