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 (439) 제10부 정염과 질투의 계절 (41)

"그렇게 자꾸 남의 시를 읊으면 나가버릴 거예요" 대옥이 일부러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모로 돌렸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밤에 나가긴 어디로 나간다는 거야? 가을비 맞고 감기가 더 들면 이번에는 정말 회복하기도 힘들 텐데" "그러니까 내 시 그만 외워란 말이에요. 창피하고 부끄러워요" "알았어. 난 그저 시가 좋아서 읊어본 거지 놀리려는 뜻은 없었어" 보옥이 이제는 입을 다물고 어두운 창밖만 내다보았다. 대나무 가지와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비파 줄을 훑어내리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보옥은 이런 가을밤에 대옥과 날이 새도록 함께 있고 싶었지만 시녀와 할멈들이 따라온 마당에 그럴수도 없었다. "비가 오는데도 보옥 오빠가 병문안을 와줘서 고마워요. 보채 언니도 아까 다녀갔고. 연와가 몸에 좋다면서 보내준다고 했는데 비가 와서 그런지 아직 보내주지 않았어요. 난 어떤 때는 부모가 없는 고아 신세를 서러워하다가도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보면 나만큼 행복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 생각된단 말이에요. 특히 보옥 오빠가 나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 때는 더욱 그렇죠" 대옥이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보옥을 빤히 바라보았다. 대옥의 맑은 두 눈에서 비쳐나오는 사랑의 빛을 느끼며 보옥은 온몸이 달콤해지는 기분이었다. "대옥 누이는 고아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마. 외할머니, 외숙모 등등일가친척들이 부모님, 누나, 오빠 노릇을 다 해주는데 무슨 걱정이야. 아무 염려 말고 몸이나 건강하도록 해. 밤이 깊었으니 나 그만 가볼게" 보옥이 갓을 쓰고 도롱이를 입으며 나갈 채비를 하였다. "비가 오고 밤인데 캄캄해서 어저나" "괜찮어. 시녀와 할멈들이 우산이랑 명와등을 들고 왔거든. 명와등은 비를 맞아도 꺼지지 않도록 되어 있잖아" "나한데 있는 유리등도 하나 더 가져갓세요. 나중에 돌려주고요" 보옥이 대옥이 건네는 유리등을 받아들고 나와 시녀와 할멈들과 함께 밤길을 걸어 이홍원을로 돌아갔다. 할멈 둘이가 각각 우산과 명와등을 들고 앞서 걸어나가고, 보옥은 시녀가 받쳐주는 우산 밑에서 유리등을 든 시녀의 어깨를 한손으로 붙잡고 걸어나갔다. 그러면서 보옥은 대옥과 함께 명와등을 들고 비오는 가을 밤길을 한도끝도 없이 걸어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였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지고 있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