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수상] 21세기는 다가오고 있는데 .. 유종호 <교수>

유종호 이 세상에서 값있는 일치고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누구나 힘들이지 않고 걸어다니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학습과정의 소산인가 하는 것은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이를 관찰하면 알 수 있다. 인류가 "바로 서서 걷기"(직립보행)를 하게 되기까지에는 장구한 시험및 학습과정이 필요했었다고 인류학은 가르치고 있다. 쉬운 것 없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의 하나가 아마도 다가올 미래를예측하는 일일 것이다. 언젠가 남북통일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쯤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를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고서는 예측이라 할 수 없다. 앞일 내다보기에 관한한 장사도 도사도 있을 수가 없다. 가장 최근의 비근한 예가 소연방의 붕괴와 관련될 것이다. 냉전 구조속의 전략적 차원에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소련 붕괴를 근사치로나마 예측한 것은 반체제 지식인의 지하출판물이었던 안드레이 아말리크의 "소련은 1984년까지 살아남을 것인가?" 정도라는 것이 통설이다. 중앙 아시아의 높은 출생률이 연방붕괴의 인종적 요소라고 지적하면서 다수 민족으로 구성된 소연방의 불안정성을 설파한 프랑스 여성학자의 혜안이 또 근사치로 지적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도 다녀간 적이 있는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연전에 낸 대저 "극단의 시대"에서 자기가 포착하지 못한 사안을 예측한 언론인에 대한탄복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40년전에 런던의 타임스지 중국 특파원이 21세기가 되면 중국을 제외하고는세계 도처에서 공산주의가 사라져 버릴것이라고 말해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만은 공산주의가 국가 이념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오늘날 아주 그럴법한 얘기라고 적고 있다. 그 특파원의 말이 정말 "예언"이랄 수 있는 것인지, 혹은 상상력과 관찰의우연한 요행이었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대담한 발언이 오다 가다 맞는 일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다만 상당히 구체적으로 얘기하고 있어서 역사가인 홉스봄에게 뒷날 자괴감을 불러 일으킨 것만은 분명하다. 흡스봄과는 여러가지로 대조적인 입장에 있던 영국의 철학자이자 사상사가인 아이자이어 벌린도 미래 예측의 어려움을 지적하고 있다. 부서지지 않는 유리가 나오면 유리장수가 문을 닫는다는 것을 이해했던 푸리에는 이른바 "자본주의의 모순"을 갈파했고 부르크할트는 일찌감치 "산업군사 복합체"의 출현을 예측하였다. 마르크스는 과학기술이 문화를 변화시킬 것이며 대기업과 계급 갈등이 그 결과의 하나라는 것을 예측하였다. 이들은 모두 강력한 제국주의 복합국가가 20세기의 중심적인 문제로 떠오르리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대영제국 오스트로-헝가리제국 러시아제국이 식민지주의와 함께 붕괴한다면 그들의 질곡밑에 신음하던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면서 그들의 운명을 창조적으로 실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의 예상이 모두 틀렸음이 드러났다고 벌린은 말한다.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이 붕괴하고 대영제국과 소연방에도 해가 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질곡밑에 있던 민족들이 평화롭게 사는 일은 요원하다. 제왕의 권력 독점과 성직자의 권위 독점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서양 중세가 19세기는 물론 20세기보다도 한결 문명화되어 있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인종 갈등과 유태인 및 이교도 박해는 있었지만 "민족주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공격적인 민족주의가 도처에서 새로운 재앙의 불씨가 되어 있다는 현실인식을 담고 있다. 험난한 날이 예고되는 21세기가 다가오고 있다. 단기적 전망은 몰라도 길게 앞날을 내다보며 여러가지 선택지의 미래구상을놓고 우리의 장래를 설계하는 중요한 일이 도무지 홀대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기껏 월드컵이나 대권 노림수 정도가 가장 빈번한 신문의 화제다. 안이하고 타성적인 작태가 아닌지 적이 걱정이 된다. 미래전망은 수치놀음으로 완결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