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 박상진 구국행적 '햇빛'..광복51주년 때맞춰 출간

51주년 광복절을 맞아 1910년 한일합방에서 1919년 3.1운동때까지 독립운동을 주도한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의 잊혀진 행적을 되살려낸 책이 출간돼 주목을 끌고 있다. 사단법인 박상진 의사추모사업회가 국가보훈처 선정 8월의 독립운동가인 박상진 의사가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야기를 담은 전기 "한의 독립투사고헌 박상진" (김웅 저)을 펴낸 것. 박의사는 1884년 울산에서 출생, 1909년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나 안중근 의사의 이토오 히로부미 저격소식을 들은 뒤 평양법원판사 취임을거부하고 조국광복을 위해 온몸을 던졌다. 단신으로 중국에 건너간 박의사는 그곳에서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관학교 설립을 논의하는 한편 중국의 신해혁명에 직접 참가했다. 1912년 귀국한 그는 1915년 마침내 대구 달성공원에서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중앙본부의 인사들을 모아 대한광복회를 결성, 총사령에 추대된다. 그뒤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한 혁명단체인 대한광복회는 우편차를 습격하거나 전국의 부호들로부터 모금하는 방식으로 군자금확보에 나섰다. 1917~18년 모금에 응하지 않은 장승원등의 악성부호를 처단하기도 했는데 이때문에 일제의 수사가 강화되어 조직이 파괴되기 시작한다. 박의사는 장승원암살의거 직후인 1917년 12월 일제에 체포돼 사형을 언도받아 1921년 대구감옥에서 순국했다. 교수형이 집행되기 전 남긴 절명시 "다시 태어나기 어려운 이 세상에/다행히 남자로 태어났으나/아무일도 이루지 못하고 가니/청산이 조롱하고 녹수가 비웃네 (난복생차세상 행득위남자신/무일사성공거 청산조녹수빈)"는 고인의 기개를 대변하고도 남는다. 박상진 의사추모사업회는 "대한광복회는 의협투쟁의 측면에서 본다면 1920년대 암살단과 의열단투쟁을 촉발시킨 선구적인 조직이었다"며 "현 시점에서 대한광복회를 실질적으로 이끈 박상진 의사의 높은 뜻과 조국애를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해 전기를 펴냈다"고 밝혔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