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호동락] 신병식 <서울방송 심의부장> .. '조화회'

고등학교 입시를 앞둔 중3의 여름 어느날, 부산시립도서관에서 잠시 머리를 식히려 뽑아든 책이 오청원 조훈현의 스승으로 유명한 고세고에9단이 쓴 위기속수교본. 그 책을 단숨에 독파하며 바둑에 빠져든지 올해로 꼭 30년째다. 그동안 전국대회 우승을 포함, 아마 최고단인 7단이 되기까지 수많은 대회와 모임에 직간접으로 관여했지만 가장 오래 되고 정이 가는 모임이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대학생 바둑대회 출신의 강자들이 모인 조화회다. 직장에 들어가서도 아마강호로서 기량을 유지하자는 취지 아래 서울공대의 이남기 (한국염공상무) 최훈 (대우건설전무), 상대의 황재부(보험대리점), 치대의 임동욱 (안암치과) 선배 등 7,8명이 76년부터 부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다가 77년에 서울 문리대 출신의 필자를 비롯,연대의 김천수 (삼성전자 이사) 한면희 (컴퓨터사업), 중대의 김달수(3A테크사장), 외대의 이상욱 (사업) 등이 합류하면서 한달에 한번 집회를 갖는 정식모임으로 발족했다. 모두들 한일 대학생 교류전의 한국대표선수이거나 최소한 대학생대회 단체전이나 개인전에서 3위 이내에 입상한 쟁쟁한 멤버들로서 발족 당시에는 전국 아마기우회 가운데 최강으로 꼽힐 정도였다. 80년대 초반부터 연건호 (장은증권이사) 조창호 (의사) 나현 (의사) 이민 (하나해운사장) 등 비슷한 연배의 직장강호들이 새로 가입해 한때는 30명 가까운 회원이 2부로 나눠 리그를 벌인 적도 있고 최근 몇년 사이에도 신성호 (세란치과) 이광영 (한약상) 등 30대 초중반의 신입회원을 받아들여 평균 20명선의 회원수를 유지하고 있다. 잠시 거쳐간 회원을 합치면 50명이 넘지만 주축은 창립 당시의 10여명으로 매년 여름의 1박2일 야유회와 송년회 등으로 가족들까지도 허물없이 애환을 함께 하고 있다. 조화회와 함께 지낸 20년은 곧 필자의 직장생활과 정확히 일치하며 회원들의 신상변동이나 참여도 등 조화회의 활동양상에 한국사회의 변천상이 그대로 반영된 듯해 흥미롭다. 이제부터 고참회원 가운데 전직을 하거나 개인사업을 시작하는 경우가 하나씩 늘어나겠지만 경비를 거의 들이지 않고도 최대의 지적유희를 즐길 수 있다는 바둑의 심오한 매력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위력을 발휘할 것이 분명하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