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국회의원의 쇼핑

지난 84년 독일 함부르크대학에서 열린 한국학 학술회의에는 10여명의 교수를 포함한 30여명의 관계인사들이 대거 참가했다. 실인즉 유럽관광을 겸한 학술회의였다. 이들이 회의를 끝내고 유럽의 유명한 관광지를 돌아 런던에 들렀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트라팔가광장 인근에 있는 바바리코트 본점이었다. 얼마뒤 이들은 모두 몸에 맞지도 않는 헐렁한 바바리코트를 하나씩 걸친 채 매장을 나왔다. 트라팔가광장은 이 "한국인 바바리코트부대"로 일대 장관을 이뤘다. 벌써 12년전의 일이다. 외제면 무엇이든 좋다고 여기는 한국인들의 생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그 뿌리가 꽤 깊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사례가 많지만 그중 대표적인 것이 태종17년(1417)에 일어난 "사신밀무역미수사건"이다. 그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조사 이도분과 부사 이발은 명의 비단과도자기 등을 사들이기 위해 엄청난 양의 포물을 가지고 나갔다가 이 사실을눈치 챈 명나라 관리들의 방해공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나라망신만 톡톡히 시켰다. 명나라 예부의 관리였던 장유신이 조선 사신들의 포물을 돈이나 물건과바꾸어 주지 말라는 금령을 미리 시장에 내려놓고 이런 사실을 조선조정에 통고해 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귀국하자마자 "외국인들에게 웃음을 사 왕명을 욕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사신으로서의 의를 잃었다"는 죄로 모두 관직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사신은 "실록"에다 이들은 "개국 이래 가장 큰 죄인"이라고 단죄했다. 그 뒤부터는 사신이 물건을 사가지고 들어오면 장물죄로 다스리는 등 엄하게 규제했지만 여전히 사신이 귀국하면 이 문제로 조정이 한바탕 시끄러워 지곤 했다. 의원외교를 위해 유럽지역을 여행한 여야 3당 부총무들 중 일부가 호화해외쇼핑을 했다고 해서 검찰이 조사에 나섰다고 한다. 또 이들 가운데 몇몇은 모스크바에서 한국대사관측의 대접이 소홀하다고 만찬에도 불참했으며,KAL기 고장으로 귀국이 지연되자 공항에서 거칠게 호통을 치고 급기야는 말리는 의원과 싸움까지 벌여 승객들의 빈축을 샀다는 등 뒷소문도 무성하다. 국회의 지원을 받은 돈으로 이들이 벌인 의원외교의 성과가 어떤것인지 묻고 싶다. 호화쇼핑 자체도 국민의 지탄을 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의원은 그래도 괜찮다"는 식의 독선적 탈법적 몰윤리적 특권의식이 더 큰 문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6일자).